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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 결과: 944개의 아이템

  • 주님만이 열수 있습니다

    열린 듯 막힌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열려 있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답답하리만큼 막혀 있네요 내 주변 이웃들을 보면 열린 듯하여 대화해 보면 장벽 앞에 서 있는 듯 소통 부재랄까 막힌 듯하여 교제가 힘드네요 눈 뜨면 열린 듯 막힌 듯한 세상에서 행성 같은 별들이 막힌 세상을 탈출하자며 뛰어보지만 우주 범주에 있을 뿐 넘어서면 실종 더 열린 곳으로 가겠다면 미아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막장까지 이르게 되지요 아담의 불순종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 모세의 홍해 바다는 막힌 듯 하였으나 열린 문이 되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가게 되었지요 막힌 듯 열린 듯 조마조마 아슬아슬 삶에 장벽 막힘과 열림 사이에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니 열려가네요.

  • 오직 성령으로

    오직 성령으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력으로도 아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 입니다. 구령사업이나 교회나 주의 종들이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Invisible God)이 보이는 하나님(Visible God)으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까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케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여기 머물라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보혜사(Com+forter) 곧 능력이 함께 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입고 살게 됩니다.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 역동적인 교회의 부흥 죽은 자가 살아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한 지도자들도 다 성령 충만했던 그리스도인들이며 모세 이사야 에레미아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줄 때 자녀들은 예언하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환상을 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을 받습니다.

  • What's the Mission ?

    선교란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는 것이다.창세기 11장 바벨탑의 언어는 폭력과 착취의 언어이다.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수단화하는 욕망의 언어다. 참 언어가 아닌 거짓된 언어, 거짓된 교제, 거짓된 만남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며, 그들의 교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교제였으며, 그들의 결탁은 하나님을 추방하려는 불경건한 것이었다. 마치 가룟유다가 제사장들과 은 스무냥에 결탁한 더러운 결탁이었다. 그들의 모든 것에는 ‘꼼수’가 있었다. 그들은 참된 생명의 언어를 잃어 버렸다. 땅의 언어만 남고 하늘의 언어를 잃어 버렸다. 식상하고 폐쇄된 죽은 언어들만이 온땅에 널부러져 있다. 우리는 참된 언어를 잃어 버렸다. 선교는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는 것이다. 탐욕으로 물든 세상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언어, 사랑의 언어, 생명의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성령 강림절에 설교하면서 주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했다.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고 타인을 수단화하는 욕망의 바벨탑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향하여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베드로의 강청은 그 옛날 바벨탑 운명 속에서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아브람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부름이다. 죽음에서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부름이며, 창조적 언어였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창조적 언어요, 참된 생명의 언어이자 근원이다. 이제 꿈꿀 수 있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능력의 언어이다. 주님은 온 세계와 열방 가운데 오직 존재의 이유가 되시며, 존재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의 언어이시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바벨 공동체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서로 합했다면, 생명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타인들을 살리는 사역을 감당한다. 주님의 오심은 바벨 공동체 안에 욕망에 찌들린 우리들을 욕망의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어 생명의 광야로 보내신다. 소외되고 버려진 광야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주어야 한다.

  •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받들어 읽을 때마다 참 놀랍다는 감탄과 감동은 끝이 없는 것같다 2019년 한 동안 우리들의 하나님의 향한 방향은 막16장에 있는 말씀처럼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파하라는 말씀이다 또 모는 사람들에게 복된 말씀을 전파하라는 뜻도 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된 말씀 좋은 말씀 축복의 말을 하라는 뜻도 된다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들의 예배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우리 이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여야지 저주를 선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민6장 22-27절의 말씀은 바로 신약성경 마가복음 26장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나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에게 주신 사명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인데 그것이 이웃들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은 스스로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아론과 그 아들들로 이어지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고 아론의 후손 곧 레위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 중에 성전봉사는 물론 백성들의 재판을 맡고 있는 판사와 검사와 같은 역활을 담당합니다 그러니까 권세의 자리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쓰임받받을 때만이고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세우시면서 주신 사명이 또 있었는데 그것이 민수기 6장의 후반절 말씀입니다 첫번째 주신 것은 축복권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백성을 축복하나는 것이었습니다 만민에게 복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죠 또 하나는 은혜의 축복을 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강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제사장들이 가져야 될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놀랍지요 그런데 이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들 곧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거룩한 제사장처럼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며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새길이 열린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제사장들 외에는 성소에 들어갈수 없고 특헤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갈 수 없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려져 있는 휘장 커튼이 갈라지며 새로운 길이 생겼기에 구원받은 누굳구든지 하나님 앞에 제사장 처럼 나가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6장에서 말씀하신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라고 하신 것은 곧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을 선포하고 은혜를 나누어주며 평강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비방하고 저주하는 사명은 없습니다 있다고 말하면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 마귀가 제사장을 그처럼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축복을 하지않으면 무엇이겠습니까 복의 반대는 저주이고 성경을 보면 저주하였더니 그대로 이루어진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권세를 사용하지 않기를 주님도 원하십니다 단지 대적 마귀 사탄에게는 써야 하겠지요 신약성경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시면 마음껏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향하여서는 축복하라 하신 것을 믿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길 바랍니다

  • 사람이 사람되게 하는 예배

    창세기 2:7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람과 동물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뛰어 넘을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 예배”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사람 외 어떤 생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릴라가 비록 사람처럼 감정을 표현하고, 간단한 수화를 사용해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비슷한 사회 체계를 가졌다할지라도, 어떤 신적인 존재를 향한 경외감을 가지고 예배하는 감각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원주민들은 그들이 아무리 미개하다 할지라도 돌무더기라도 쌓으며 “예배” 할 대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죽음으로가 끝이 아님을 사람은 알기에 피라밋을 쌓기도 하고, 죽은 시신을 강물에 띄어 보내기도 한다.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그 마음, 사람에게만 있는 그 마음, 성경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성경은 사람과 동물을 흙으로 지었다고 말한다. 과학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원소 기호(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산, 칼륨, 칼슘, 마그네슘, 황, 규소, 철, 붕소, 망간, 아연, 구리, 몰리브덴. 등 )가 흙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흙만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 넣으신 “생명의 기운”은 히브리 원어로는 “ 루아흐” 로 쓰이는 데, 이것은 숨, 호흡, 하나님의 영, 바람 , 이라는 단어로 구약에서 쓰이는 말이다. 아담의 히브리 원어는 하나님의 영을 담은 붉은 흙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담은 육신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Gas를 채워야지만 시동이 걸리는 자동차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영을 담아야지만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영혼의 빈 공간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채워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라도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자아, 힘, 권력, 쾌락, 물질, 지식, 애정, 사람…. 그러나, 일반 차에 일반 gas가 아닌 디젤을 주입하면 고장이 나는 것 처럼,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운 사람은 고장이 나게 되어있다.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차는 수명이 다한 차다. 이 고장난 사람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성령님이 오셔서 다시 거하실 수 있도록, 죄의 값인 죽음을 당신이 직접 치루시고, 그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성령님은 더러운 곳에는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성령님을 늘 모시면서, 성령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후 부터, 여러 가지 없었던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 예전에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이제는 죄가 밉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 여겨져도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방향감각이 생긴다. 무엇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되는 감각이 생긴다. 성경을 읽으면, 예전엔 그렇게 지루던 말씀들이 꿀송이처럼 달아지고, 깨달아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달라진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무언가 한주간이 불안해서, 하나님께 얼굴 도장 찍으러 나오는 종교적 관습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목마른 시간이 된다. 예배는 나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감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내 온 몸과 마음으로 경배하며, 매 순간 마다 세상 속으로 달려 나가는 내 육신의 질 그릇 안에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을 담는 시간이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에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찌니라(요4:23-24) 하신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이 하나님의 영과 교제 하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서 더욱 내 안이 성령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존귀함이 달라진다. 아무리 금그릇이라 해도 세상 것으로 가득 담겨있다면, 하늘나라에서 그것은 존귀한 그릇이 아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 해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가득 담겨 있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의 존귀한 그릇이다. 주일 예배는 다시 한번 내 육신을 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움받는 시간이다. 예배의 맛을 본 사람만이 예배를 사모하게 된다. 주일날 드려지는 예배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맛을 보는 시간이다. 그 맛을 본 사람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천국의 맛을 본 사람만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맛을 보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 깊이 있는 개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한다. Worth(가치) + ship (신분)이 만들어진 단어이다. 즉, 나의 참된 가치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한주간 먹고 사는 문제로, 땅을 보며 살다가, 주일 예배 시간에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래, 나의 삶이 이 땅이 끝이 아니지 하며, 나의 가치가 이 썩어질 육신이 전부가 아니지 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 나- 태초의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가면서 예배의 맛이 깊어가야 된다. 천국을 향한 소망이 깊어져야 한다. 육신이 아닌 성령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어야 한다. (육적인) 사람이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는 시간이 예배 시간이다.

  • “엔학고레”와 “라맛 레히”

    40년간의 블레셋 통치의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선택하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포도주와 독주,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 구별된 삶을 그의 부모와 그에게 하나님은 요구하였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 정상적인 사사로 구원 역사에 쓰임 받게 될 것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하지만 삼손의 삶은 딤나 여인을 사랑함으로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연애함으로 감행하였다. 결혼식을 올리려고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그는 사자를 만났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는 사자 새끼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그 이후에 사자의 주검에서 나는 꿀을 취하여 먹는 죄를 범하였다. 따라서 삼손은 연애와 하나님께서 정해준 규례를 어긴 결과로 그는 잔치 7일 기간 동에 신부를 다른 우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삿 14:1-20). 삼손은 그것이 원통해서 복수하려 블레셋으로 내려가서 여우 300마리를 어떻게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잡아서 꼬리에 횃불을 달아 블레셋 지방에 돌아다니게 함으로 블레셋에 치명적인 손해를 주었다. 그 이후에 그것에 화를 내고 달라 드는 블레셋 사람 1000명을 나귀 턱뼈로 물리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것처럼 자랑하고, 행세하여 “라맛 레히”(나귀 턱뼈의 언덕)(삿 15:17)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행위를 기뻐하실 리 없었다. 결과로 그를 일깨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에게 심히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는 어려움을 당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항복하고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은 또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다.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삿 15:18) 이제야 삼손은 정신을 차리고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부르짖은 자의 샘)(삿 15:19)라고 지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삼손의 “라맛 레히”와 “엔학고레”를 보면서 남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잘 된 것은 내탓이고 못 된 것은 조상탓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조금 남 보다 뛰어난 결과를 보이면 자기 자랑하고 나타내고, ‘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삼손의 교훈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 자랑,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냄으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죽을 고생을 치르고 난 다음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엔학고레”를 외치는 어리석음을 재탕하지 말아야 하겠다.

  • 헤겔의 철학적 접근

    헤겔은 흙 속을 '진무(塵霧)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흙이란 고난, 좌절, 한계상황, 숙명을 상징한다. 씨앗은 이 흙 속에 들어가야만 싹이 나고, 입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땅속에 들어가서 암흑과 습기와 절망과 죽음과 지옥 그리고 썩음, 이것을 거처 나오는 것이 싹이고 잎이며 꽃이고 열매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듯 사람은 하늘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은 "하나님 가슴에 안겨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씨앗도 열매를 맺기까지 일곱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 과정은 철학적 용법으로는 소아(한 알의 밀)가 무아(땅에 떨어져 죽은 상태)가 되고 마침내 대아(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과제는 어떻게 '소아'가 '대아'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소아가 대아로 되는 상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무아'에 이르는 길을 기독교는 십자가로 상징한다. 즉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곧 무아요, 십자가이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다시 사는 것(New Birth)이다. 모든 인간의 삶 중에서 첫째가는 문제는 우리 자아에 관한 문제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참 내가 되느냐?" 내가 가짜의 나를 잊고 진짜의 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나는 '있다'가 아닌 '없다' 즉 대아"라고 설파했다. 대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빨리 '내 중심적인 것을 죽이느냐', '자기를 제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생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 사회생활에서나 우리의 삶이 소아에서 대아로 이르러야 비로서 나도 살고 가정도, 섬기는 교회도, 국가도 살 수 있다는 이 진리를 겸손히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 기도할 수 밖에는

    얼마 전에 NYSKC MOVEMENT에 협력하며 나를 그림자처럼 돕던 한 분이 어느 한 교회로 부임하셨다 십여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말씀 중심에 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활동하며 미주 전 지역은 물론 세계 많은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힘쓰고 애썼던 목사님이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축하하여 주었고 새롭게 시작되는 목회에 기쁨과 기대를 모아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렬하게 환영하였다 그런데 기존교회에 새롭게 부임하시는 목사님들이 다 그렇듯이 원로목사님과의 관계가 시간이 흐르면 더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소원해지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내 가깝게 있었던 목사님이 부임하고 이제 3개월 남짓한데 벌써 심상치 않는 조짐이 보이는 것같다 부임할 때 당회의 만장일치 안수집사회의 만장일치와 중직들의 만장일치 제직회에서 반대의견없이 통과되었을 정도로 교회가 환영하고 원로목사님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하시던 대로 목회하여 주실 것을 요청할 정도많큼 서로가 통했으며 사역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부임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로목사님의 목회적 방향은 뒤로 하고라도 신학적인 문제에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같다 예컨대 금식을 하라고 한다든지 기도원에 올라가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와서 설교하라든지 하는 요구를 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목회경륜이 일년 오년 된 것이 아니고 무려 25년이나 된 목회자요 나름대로 신학을 강단에서 강의하였고 목회의 선상에서 그래도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인데 이처럼 요구하는 것은 좀더 조심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목회자는 기도와 말씀은 생명을 줄과 같고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필수 중에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주문하는 요구 안에는 신령한 목사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설교해야 한다는 식에 목회와 신학의 방향을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는듯하다 과거에 많은 목회자들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목회를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견이 없다 그리고 또 그와같이 하는 것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같은 목회자라 할지라도 은사가 다르고 달란트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기도와 말씀을 어느 목회자가 거부할 것인가 만약 거부한다면 그것은 목회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을 받아서 설교하라는 요구는 현재의 목회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아닌가 또한 현재의 사역에 대한 불만을 신령이라고 하는 영적인 것에 두고 매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고 그것은 곧 신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 구약의 시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나가 전하는 선지자들과 같이 되라는 조건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다 보여주셨고 그것을 바라보았던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기록하였으며 그중에 사도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으며 40일만에 승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도상에서 직접 만난 뒤에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분이 하신 모든 일들을 전파하는 일에 목숨을 다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자 이것은 영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영이 아니신가 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것 모든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영을 믿는 다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에 세례를 받아라 등등의 표현을 하는 것은 다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안약을 사서 발라라 하는 말씀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언제나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하신 것은 영적인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는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도 볼 자가 있느니라 하신 것처럼 영적인 것을 강조한 말씀이다 신령한 세계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신비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뒤로 하더라도 맡겨진 후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종에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것처럼 들려지는 것은 목회적으로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영파라고 하는 한간에 말처럼 그런 목회로 분리되거나 구별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단어에는 베런스라는 하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만이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볼 때도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Complete 완전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는 하나이면서 또한 그 나타내심은 다르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되며 그 중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그 삼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안겨준다 삼위일체의 신앙이야 말로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루터나 칼빈이나 카이퍼나 하지 메이천 많은 개혁주의 신앙의 선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원로와 후임의 문제는 어찌보면 영적인 갈등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자리싸움이라는 것으로 비추어지지만 사실은 영적인 갈등이 아주 심각하게 작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많은 교회들이 후임자를 찾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과연 영적인 방향이 편향되었는가 아니면 건전하고 벨런스가 잘 받는가 지금까지 내가 해 오던 목회적 방향과 같은 것인가 하는 것들을 찾아 후임자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을 흔히 볼수 있다 그때마다 다른 후임자들 보다는 현재의 목회자의 자녀도니 목회자를 후임으로 선임하는 것을 몰 때 의견이 분분하다 세습이라는 말을 하는 것부터 구약에 보면 제사장 집안에서 제사장을 세워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가 하면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고는 한다 눈물과 기도로 이룬 엄청난 재산을 놓고 서로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립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또 내부적으로는 세습이 아니라 목회적 관점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외부에서는 대불림이라 하여 사회적 문제화를 꾀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본다 어쩌면 현대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것보다 교회의 세속화 혹은 쇠퇴 중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해 본다 이것은 단순히 원로와 새로 부임된 목회자와의 관계도 있겠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잡 미묘한 영적이며 심리적인 문제가 이닐까 혹 경제적인 문제도 그 중에 하나 일 것이며 인간에 욕심도 그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이것이 현재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숙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이와같은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 내의 갈등을 세상법정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싸움박질을 하면서 나의 주장을 관철하겠는가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목회자의 일들은 진정 믿음에 대한 영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누가 옳고 그른 것이라는 편견을 갖기 전에 서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목회를 한다는 것이

    목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아주 일상적인 목사에게 묻는 말이다 목회(牧會, ministry)는 교역(敎役) 사역(使役)이라고한다 사전에는 "목사 혹은 전도사가 행하는 모든 교역자적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목회자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목회일 수 있지만 목회에 있어 우선순위가 있고 목회의 본질과 비본질이 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목회외에 어쩌면 목회학에서 말하는 교회 밖에 일을 하고 있다 즉 목회의 비본질적인 것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파라처치 운동이라고 할까 어찌보면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결국 교회가 할일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첫번째 예배회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교회중심의 Movement를 하고 있다 세번째는 예배회복을 통해서 교회와 가정을 살리려고 하기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중에 핵심이 목회자들의 예배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회를 하는 목회자를 영어로 'minister' 혹은 'pastor'라고 부른다. 'minister'에서 파생하는 단어들을 보면 봉사와 관련된 의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pastor'에서 파생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양을 치는 목양(목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즉, 단어의 의미를 하나로 합쳐서 협의적인 정의를 내린다면, 목회란 "양무리를 돌보는 섬김"인 것이다. 목회자의 모든 행위가 목회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양무리를 돌보는 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목회의 우선순위와 본질은 모두 양무리를 섬기는 일에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의 본질이란 양무리를 들보는 일을 의미하며, 영적인 돌봄과 공급, 세움, 지도, 후원, 지지, 격려, 권면, 징계등을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개역개정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목회자)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골로새서 1장 24-29절까지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특히 28절과 29절을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개역개정판) 이 말씀은 목회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목회라는 것은 각 사람(28절에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영적인 노동이자 수고인 것이다. 더 나아가 목회란 단지 인간의 노력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동역적인 노동인 것도 언급하고 있다(29절을 보라!)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이다. 우리가 잘 아는바 그래도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장이다. 이런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16,17절) 그리고 이 베드로의 대답에 다시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Tend My lambs, 15절), "내 양을 치라"(Shepherd My sheep, 16절), "내 양을 먹이라"(Tend My sheep, 17절)라는 부탁과 위임을 하셨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의 목적과 내용과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사람 한사람을 온전(완전)한 자(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봉사의 일(사역)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예배 중심으로 양무리를 향하여 말씀과 기도로 돌보며, 치유하고, 가르치며, 양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의 원리를 열 가지로 정리들을 한다 1) 목회의 기초는 인격이다. 2) 목회의 본질은 섬김이다. 3) 목회의 동기는 사랑이다. 4) 목회의 척도는 희생이다. 5) 목회의 권위는 복종에서 나온다. 6) 목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7) 목회의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이다. 8) 목회의 특권은 성장이다. 9) 목회의 능력은 성령이다. 10)목회의 사역은 하나님이 기뻐하여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 난리법석 같은 요즘

    요즘 한국에서는 국민적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에 국가가 마비된 것같은 사건이 벌써 열흘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1년 전에는 한국 해군의 배가 북한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침목되는 사건이 있어 수십명의 희생자를 내어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지었는데 이번에 사건은 300명이나 되는 어린학생들이 어른들에 관행과 타성으로 말미암아 배가 침몰하여 숨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국은 문화는 머추었다는 뉴스의 머릿글을 보고는 참으로 안타깝다 안전교육과 안전조치를 취하고 선상의 메뉴얼에 따라 작동하였다면 별일이 없었을 텐데 하고 안전불감증에 관한 뉴스가 계속나오고 있다 배에 수장이라고 하는 선장을 비롯한 항해사 등등 배에 직원들은 탈출하면서 승객들에게는 기다리라는 방송을 끝으로 어린 학생들이 집단으로 사지에 몰아넣었다는 조사가 발표됨에 따라 그 가족은 물론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져 있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중에는 야답법석 혹은 난리 법석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난리법석이라는 말은 표준어가 아니라 야단법석에 비슷한 말로 쓰인다 원래 이 말들은 불교에서 쓰는 말로서 자기들에 신에게 법회를 드릴 때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게 될 때 쓰는 말이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Make a Fuss About !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쓰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자로는 야단법석 [ 野壇法席 ] 野 : 들 야 壇 : 제터 단 法 : 법 법 席 : 자리 석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며 또한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굶”을 뜻하는 야단법석의 한자 표기를 일부에서는 ‘野壇法席’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야외에 베푼 법회”를 뜻하는 말입니다.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할 때는 ‘惹端法席’으로 쓰기도 한다 이와같이 미국에 살면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고국에 대한 뉴스가 언제나 가깝게 들릴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똑같이 느끼는 이유는 그곳에도 가족이 있기 때문이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생명에 귀함을 알기 떼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와중에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되고 있어 요즘 뉴욕서광교회는 오하이오 주 세이빌에 신학교 세우는 일로 바쁘게 돌아간다 뉴욕에서 약50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센신학교의 오픈은 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작은 불꽃하나가 온 산을 태운다는 말씀처럼 뉴욕에서 퀸즈라고 하는 곳에서 롱아일랜드 시티 선니사이드 그 중에서도 그린포인트 4509204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사업이 어느 무식하고 죄인 중에 괴수에게 꿈을 주시고 비젼을 보여주시므로 시작된 일들이 하나 둘 그것들이 이루어져가고 있어서이다 전교인이 움직이며 기쁨과 감사로 이와 같은 이들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차분한 가운데 기도하며 자기가 맡은 역활을 감내하며 내게 주신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쓰고 있다 난리법석도 아니요 야단법석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정 그리고 예배회복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저들의 신앙으로 나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동안 뉴욕서광교회를 통해서 고센서광교회,나이스크 월드미션을 비롯하여 회복의 신학연구학회(Nyskc Learned Society) 극단 미클랏 , 각 컨퍼런스와 Nyskc Leadership Academy, Goshen Theological Seminary,SKBTV(구원의 소리방송),도사출판 미클랏, 계간 예배회복,웹사이트: (예배회복 예배회복운동 nyskc.org, miclot.org)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은 Nyskc Foundation를 세움으로 그 사업들이 이루어졌다 4월30일 6PM에서 시작되는 이번 Open House는 전교인이 500마일을 차로 달려와서 환영하며 기쁨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며 이웃들을 초정함에 시장을 비롯하여 의회의원들 판사들 변호사 경찰 소방소 등등 현지역에 모든 인사들을 초청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어 쓰임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 싫은 것과 틀린 것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눈물에 씨앗이라고 말합니다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바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유행가를 보면 사랑타령이라고 말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발라드 풍으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1 중세 유럽에서 형성된 정형시의 하나.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이다.2 자유로운 형식의 서사적인 가곡이나 기악곡.3 대중음악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감상적인 노래) 그만큼 사랑이라는 것이 모자란 것이죠 수가성여인이 왜 다른 남자를 6번이나 바꾸어서 살고 있나요 사랑의 만족이 없었기 때문이며 헌전함이나 공허함을 느낄 때 그것이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 남자를 바꾸었습니다 그 여인은 남자를 바꿈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어떤 남자가 나를 채워주려나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얻지 못하고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세상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을 때는 물길러 나오지 아니하고 빨래하러 나오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랑을 구하려다가 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채우려다고 오히려 사회적 부정적 협오만 얻은 결과였습니다 그 여인에게 사랑은 남자였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남자를 잘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신랑을 잘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 진정으로 자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엉뚱한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 성령의 채워주심이었던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사랑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영생수가 되시는 예수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사랑타령을 하는지를 잘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처럼 사랑을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으로만 찾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보면 여러가지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어 생령을 넣어주시므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해 존재)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그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 복주심) 하나님이 언약하여 세운 언약의 사람이었습니다(언약의 백성)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구원의 백성) 하나님이 택하여 주셨습니다(믿음의 백성) 그리고 틀린 것은 틀렸다 맞는 것은 맞았다 하신 것이 사랑이셨습니다 그 기준은 언약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말씀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약속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순종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매와 책망 징계가 있고 사랑은 위로와 용서와 이해가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틀린 것을 고치라는 것은 사랑인데 잘못된 것을 싫어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아니됩니다 틀린 것을 책망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틀린 점을 지적하고 책망했다고 해서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사랑이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자 자식이 집을 나가버리면 부모가 잘못된 것입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수가성여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적이지 못한 것이죠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얼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도하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쓰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정신을 차리고"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멀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에 미움이 가득차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미워죽겠으니 기도가 될까요" "사랑은 죄를 미워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 세계 선교를 위한 10가지

    1.성경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읽어라 하나님께서 민족을 축복하시는 구절을 찾아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널리 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각 부분을 세밀하게 살펴보라. 그리고 각 장에서 발견된 것을 기록하다. 2.선교행사에 대하여 배우는 시간을 갖으라. 선교 정보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며 매 3-6개월 마다 선교사의 전기를 읽으라. 선교사의 실제 삶과 문제, 사역에서의 성공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며, 선교 행사에 대한 비디오 자료들을 구입해 시청하라. 3.선교사와 깊은 교제를 갖으라. 선교사가 당신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 개인적인 교제를 쌓으며, 선교사를 집으로 초대하며, 그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서신으로 지속적으로 교제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하라. 4.선교 환경에 친숙함을 길러라.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으나 선교지역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들을 배울 필요는 있다. 나라의 이름들을 암기하며, 그 위치, 가족 구성원, 종교의 구성, 복음의 장애물, 핵심적인 기도제목 등. 각 나라에 따른 최소한 1가지 이상의 사역의 유형을 분석하고 신문의 여러 가지 뉴스를 통해 확인하라. 5.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라. 세계에 대한 모든 정보, 특별히 뉴스를 이용해 매일의 기도에 활용하라. 그리고 "세계 기도정보"(Operation World.)와 같은 자료들을 활용하라.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묵상과 기도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6.최소한 한번 이상의 단기 선교에 참여하라. 최소한 한번 이상의 다나기 선교여행에 참여하라. 예를 들어 "기도여행", "병원선교" 등. 선교 사역지로 선정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곳으로 선택하라. 7.선교에 관심이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라. 함께 선교에 대하여 기도하며, 서로가 갖고 있는 정보들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라.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룹이 알고 있는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지를 논의하라. 8.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 선교부가 어떤 사역을 하는지를 확인하라. 교단 선교부의 선교소식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라. 그러나 모든 교회들과 선교회들의 자료를 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선교 동참 기회가 있는지를 비교 분석하며, 자신의 교회에 선교에 대한 행사와 보고회를 계획하며 다른 성도들이 선교에 대하여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라. 9.선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사람들을 모아 기도회를 구성하라. 세계 선교와 구체적인 나라, 혹은 사역을 위한 매월 정기적인 기도모임을 만들며, 그리고 교회와 교단이 앞으로 어떤 사역들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라. 그리고 그들이 선교에 동참할 수 있도록 격려하라. 10.선교의 꿈나무들인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하여 도전하라. 우리는 자주 선교사는 성공을 위한 작은 선택과 함께 직업 선택에 있어서 두번째에 속한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실수들이다.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선교에 대하여 중요한 장기 선교사가 될 어린 아이들 격려하며 지도해야 한다. 특별히 최소한 단기 선교프로그램에 참여케 함으로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실제적인 점검 실제적으로 전 세계 소년들의 60%가 복음전도와 어떤 모습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활동적인 선교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많은 청소년들을 선교에 연결시켜야 한다. 이 목록을 활용하던지 혹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이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통한 경험을 기반으로한 유사한 목록을 만들어 활용하라. 친구들에게 복음전도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함께 나누라. 제안 1. 당신의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목록들을 실천하라. 2. 이 목록을 당신의 교회 기도제목에 올려라. 3. 포스터를 만들고, 그레픽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라. 4. 이 목록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교회의 다른 성도들에게 도전하라. 5. 잡지나 소식지에 위의 목록을 실어라. 6. 이 목록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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