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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하나님
고후13:13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이 편지에는 삼위일체적인 축복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작은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어거스틴이 해변을 산책하가 한 소년이 모래밭에 도랑을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나는 내 도랑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바다를 비우려고 합니다.' 당시 라틴 교부 중 가장 위대했던 어거스틴은 소년의 말을 듣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모래밭에 만든 작은 도랑으로 바다를 비우려고 생각한다. 때로 나도 그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우리 마음의 작은 한계에 가두려고 한다.' 삼위일체의 불가해한 신비는, 이것이 유일한 불가해한 신비라는 것이 아니고 이 불가해한 신비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욥5:9 11:7 롬11:33-36). 1. 삼중인격체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사48:16 마28:19) 1) 하나님의 인격(출3:13-15 마1:2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현시는 항상 인격적입니다. 그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15 4:5 마22:32)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구약에서 그의 인격적인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이며(출3:13-15),신약에서는 그의 이름이 예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마1:21). 2) 삼위일체의 계시(창1:26 사48:16 마28:19 고후13:13)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실 때, 그는 자신을 셋 안에 하나인, 하나 안에 셋인 삼중 인격체로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모두 동등하며, 함께 공존하며, 본질상 하나이나 현현에 있어서는 셋으로 나타납니다. 2. 구약에서의 삼위일체(창1:26 신6:4,5) 구약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밝히 계시되지 않고 있지만 후대를 위해 그것이 암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엘로힘(창1:1)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의 단수형은 '엘'이고, 그 복수형은 '엘로힘'입니다. 창1장에서 32회, 모세 오경에서 500회 이상, 구약성경 전체에서 5,000회 이상, 복수형 '엘로힘'은 예외 없이 단수형 동사와 함께 사용됩니다. 2) 여호와의 사자(창22:11,12 출3:2)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현현, 즉 주 예수의 성육신 이전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외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했을 때 막으셨고(창22:15-18), 불 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3:1-4). 또 믿음을 지키다가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던 3명의 히브리 청년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건져 주셨습니다(단3:25-27). 3) 루아흐(창1:2) '호흡'이라는 뜻의 '루아흐'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령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성막의 여러 가지 기구와 장식을 만들게 했습니다(출35:30 36:7). 또 다윗에게 임하셔서 다윗이 수금을 탈 때사울을 사로잡고 있던 악신이 떠나게 했습니다(삼상16:14-23 18:10 19:9,10). 3. 신약에서의 삼위일체(마28:19 고후3:13) 마1:20 이하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인격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마리아를 잉태시킨 성령, 그리고 자기 백성을 죄에게 구원할 성자 예수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도 함께 나타나셨습니다(마3:16,17 막1:9-11 눅3:21,22).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눅1:35 요14:26 갈4:6 엡1:17 2:28 3:14-16 4:4-7 5:18-20 6:17-23 벧전1:2 유20,21 계1:4-6). 1) 성부 하나님(마6:9 요6:27 엡4:6)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신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육체 안에서 연합시키셨기 때문입니다(롬6:3-5 갈2:20).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요1:12). 2) 성자 하나님(히1:8)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11). 그러므로 예수를 통해 성부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고후13:13). 3) 성령 하나님(행5:3,4 고후3:17)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로 성령께서는 믿는 성도를 성전 삼아 거하십니다(고전3:16 6:19). 구약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인 성령의 도우심으로 초자연적인 사역들을 감당했지만(삿3:10 6:34 14:6 삼상16:13), 신약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신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므로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가 잉태하였을 때,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녀를 복되다고 찬양했습니다(눅1:41-43).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것을 이유로 마리아를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3위이신 성령을 일생 동안 우리 안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4) 하나님께서 삼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이유(사63:7-9 고후13:13 계1:4-6) 성경의 여러 곳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경우에 때때로 무서운 경고와 심판을 동반하고 나타나십니다(출19:12,13,16 마12:31,32 21:44).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연합하여 나타나실 때에는 예외 없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사63:7-9 고후13:13 계1:4-6). 이것이 하나님께서 삼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 주를 앙모하는 사람들(They that Wait upon the Lord)
사40:27-31 주를 앙모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사람들은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지겹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듣고 찬양하며 사는 것이 싫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더 새로운 것이 없을까 하고 찾는 사람들이 있거나 지겨워서 그만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년을 한결같이 매일 같은 방법으로 주여를 부르며 통성으로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강단에서 외쳤습니다 지겹습니다 그리고 조금 쉬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세상은 늘 새롭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그 호기심은 그를 세상가운데로 이끌고 세상에 것을 취하도록 하게 합니다 세상이 주는 호기심은 유혹일진데 그것이 좋기만 하다는 이유로 따라가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망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굉장히 어리석지요 미련하지요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호기심을 갖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곧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곧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피곤하지도 않으시고 곤비치도 않으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십니다. 앙망, 앙모라고 하는 말은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은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뜻을 잠깐 살펴보면 앙망이란 말은 “바라고 기다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앙망한다, 여호와를 앙모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바란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의지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렵더라도 지겹더라도 괴롭더라도 재미가 없을지라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끝까자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찾으시고 바라보시며 기다리시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앙망하면 성령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사랑의 영, 은혜의 영, 지혜의 영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주님 앞에 나와서 1년도 아니고 한평생 믿음의 생활하는 것은 배후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를 길러주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과 삶과 이 확실한 우리의 삶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11 말씀하시기를 세상을 경배하고 숭배하러 가는 사람은 마귀에 이끌리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내가 가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대로 내가 행하는 것 같지만 마귀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마귀에게 끌려가는 삶입니다. 마귀의 종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술집에 도박판에 가는 것 같고 범죄를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마귀가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 자체는 내 뜻과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신명기 28장 49절에 보면 “독수리가 그 새끼를 기르듯이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길러주신다.”라고 말씀합니다. 미국에는 독수리 형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의 왕입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가 한없는 보살핌과 희생으로 끊임없이 돌보아 독수리를 길러 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도와주시고 독수리 같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독수리 같이 올라갑니다. 주님을 앙망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가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도우사 이 악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유약하고 병들며, 나약한 우리의 다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실로 강한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세상적인 육체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실 때 주어지는 능력만이 참 능력, 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 오직 하나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힘 있는 자가 다 실패해도 성령으로 함께 하는 사람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어떤 힘으로 해결하고 감당해야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대한 인물은 자기가 세상을 이길 수도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오는 공격도 잘 받아냅니다. 모세 보십시오. 바로 왕만 이겼습니까? 바로를 이기는 것보다 열배나 더 큰 시련 어려움이 많이 왔습니다. 얼마나 수많은 펀치가 날아와도 모세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만 받았습니까?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만 때려서 넘어뜨렸습니까? 그것 하나뿐입니까? 자기에게 오는 어려운 물맷돌은 천개, 만개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끝끝내 이겨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기사와 이적과 능력만 행했습니까? 욕이라는 욕은 다 얻어 먹었습니다. 침 맞고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 죽으시기까지 합니다. 다 당하는 것을 잘 당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도 능력이 물론 많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못한 일이 없지만 바울의 능력에 관한 것은 몇 번 안 나옵니다.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고 환란핍박 당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어려움을 다 이겨냅니다. 가정생활에 승리하는 가정은 좋은 일만 있어서 사랑하고 이해하며, 관용하고 먹을 것 입을 것 많으며, 직장 좋고 건강해서 행복합니까? 가정에 오히려 슬픔, 실패, 상처, 아픔, 눈물이 앞을 가리고 걷잡을 수 없는 이 어려움이 오지만 이겨내야 행복한 거지,좋은 일만 있어 성공하려는 사람은 이 지상에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려움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기사, 이적과 능력을 행하고, 예언하고 방언하며, 병 고치는 이런 은사도 본문에 쭉 있지만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보이면서 거기에 감당해 내어야 가정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은혜만 받고 좋은 일만 있으면, 좋은 소리만 들으려면 그 사람이 교회 생활에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면 이런일 저런일 있어도 다 이겨내는 성도입니다 모든 영광은 싸움에서 옵니다. 모든 아픔 다 경험하고 온갖 망치로 두들겨 맞으면서 그다음에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지,쉽게 올라오는 일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왜 좋습니까?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됩니까? 이 세상에 별의별 어려운 일을 성령 안에서 우리는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내가 승천하면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에게 임하면 뱀을 집어도 독이 없고, 독을 먹어도 독이 없으며, 귀신을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물리치며...” 이런 사도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능력으로 뱀의 독을 이길 수 있었고 수많은 전염병을 이길 수 있었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증인의 사명을 끝까지 다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 여러분도 독을 먹어도 독이 되지 않고, 여러분이 뱀에 물려도 뱀이 여러분을 해치지 못하는, 독이 여러분을 넘어뜨리는 못하는 능력이 있고, 질병도 고치고 저주도 물리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만나지 않습니까? 홍해를 만났을 때 모든 백성들이 원망합니다. “우리 이제 죽게 되었다. 우리를 애굽에서 죽게 하지 왜 여기 데리고 와서 물에 다 빠져 죽게 하느냐?” 모세를 향하여 온갖 원망을 합니다. 모세는 걷잡지 못합니다. ‘이것 어떻게 해야 될까? 정말 죽게 되었구나.’ 그러나 믿음이 없어 망하는 것이지, 물에 빠져 죽는 일는 절대로 없습니다. 내 앞에 적이 왔다 해서 총칼에 죽는 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믿음을 떠나면 길에서 넘어졌는데 죽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는 우리 앞에 있는 어려움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모세를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 왜 내게 부르짖느냐?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었는데. 네가 가진 지팡이를 가지고 바다를 한번 내밀어보라.”고 그랬습니다. 바다에 내미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다가 움직이면서,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60만이 그 바다를 통과하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든 삶을 끊임없이 도와주십니다. 인도하십니다. 내일 길을 알지도 못하는 분이 앞에 가면서 성령을 도와달라고 하면 우리의 길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여!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앞날을 왜 염려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염려, 걱정, 죄악을 버리십시오. 불의에서 떠나가십시오.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거룩한 길로 독수리 같이 힘 있게 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위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젊은 사람들도 지칠 때가 있죠. 혹시 벌써 지치진 않으셨겠죠. 젊은 이라도 넘어지고 지치고 성경에 자빠진다는 말도 있더군요 이사야 40: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의 내용을 곡조 있는 찬송가로 만든 것입니다. 주님을 앙모하는 자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도록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심을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0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말씀이 펼쳐집니다. 43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긍휼이 여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역사와 시내광야 사막에서 40년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섭리를 독수리의 날개로 업어 하나님의 장소로 이동케 하셨다고 표현하셨습니다(출 19:4). 신앙 세계에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독수리의 힘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힘은 공중의 새들 중에서 제일 강합니다. 갑자기 천기가 험악하여져서 뇌성이 나고 소낙비가 내리게 되면 공중을 날아다니던 모든 새들은 비를 피할 만한 처마와 같은 곳을 찾아 분주하게 피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오히려 힘찬 날개를 치며 올라 시커먼 먹장구름을 뚫고 창공 위로 날아 빛나는 태양과 화창한 하늘로 나아갑니다. 그렇듯,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능력은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평상적인 능력이 아닌 초자연적인 힘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며 믿고 인내하는 자에게 임하게 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고후 4:7-9).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독수리의 날개로 그 백성들을 업어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구출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19:4). 독수리들은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일부러 둥지에서 떨어뜨립니다. 새끼들이 본능적으로 날개 짓을 하다 힘이 부쳐 떨어지게 되면 어미 독수리가 잽싸게 날아와 큰 날개로 새끼들을 받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그뿐 아니라 새끼들이 오래 졸고 있으면 둥우리를 흔들며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 정신을 차리도록 훈련하며 건강하고 힘센 독수리로 성장토록 수고를 합니다(신 32:11-12)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 말씀을 주시고 사랑과 공의를 베풀며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을 갖고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므로 약속의 땅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는 자가 되어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입성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신 1:36). 오직 여호와 주님을 앙망하는 자 만이 새 힘을 얻게 되며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시 103:5).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안연히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의 골짜기와 험산준령에서 구출하어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시 23편). 하나님께서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셔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에 있게 하셨습니다(사 40:11). 우리가 여호와를 향하여 눈을 들면 창조주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영혼을 영원까지 지켜주길 것입니다(시 121:7-8). 주를 앙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더 많은 복과 힘을 얻게 됩니다. 마치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 치며 하늘 높이 비상함 같이 주를 앙모하는 자는 올라갑니다.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낙후되지 아니합니다. 퇴보하지 않습니다. 점점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더 잘 되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천한 자를 존귀하게, 낮은 자를 높게,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쓸모없는 자를 쓸모 있게,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려내십니다. 점점 잘 되게 높아지게 하시고, 복을 부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라.” 영육 간에 복을 주시며 신분을 높여 주시며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는 줄을 믿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 같이 향상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올라가는 복을 받습니다.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임이요” 여러분! 독수리가 날개치며 창공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노회 목회자 모임에서 철원엘 갔을 때 거기서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데 그때 이 말씀을 실감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힘차던지요!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는 그렇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이 생활이 향상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올라가는 힘을 얻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만 사랑하던 생활을 이기고 의와 진리와 하나님을 구하는 삶으로 올라가고, 명예만 따라다니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으로 올라가고, 받으려고만 하던 생활은 주려고하는 생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달라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위로 끌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둘째,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즉 고난을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역경을 당하고 핍박받는 등 상황에 따른 극한 환경 속에서도 지치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거듭할지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독을 마실지라도 화를 입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고난과 시험이 크면 큰 만큼 축복도 큽니다. 욥기의 교훈처럼 고난이 축복이 되는 전화위복이 있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가 결국 승리합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는 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달음박질 하여도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① 먼저 생존 경쟁으로 혼신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상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던져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인들 역시 무한 경쟁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하고 변화하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현대인들은 끝없이 긴장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곤하고 때로 지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② 뜻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그런 상황입니다. 인생은 때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고를 만나야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질병이 닥쳐서 몸이 아픈것도 문제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물질을 감내해야나는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숨가쁘게 뛰어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먼저 이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겸손하게 살아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이런 형편을 만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잘 극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불평, 원망, 염려를 조심해야 합니다. 곤고한 상항을 만나면 자동장치가 작동되듯이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데 이 마음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때에 정신을차리고 믿음으로 그렇게 주를 앙모하면 주께서 새로운 권능을 주시는데, 그 모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사 43:2말씀과 같이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침몰치 못하게 하여주시고, 불을 건널 때에도 불꽃이 사르지 못하게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함께하시므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음박질 할 때도 힘을 주셔서 곤비치 않게 하는 것은 신앙 생활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셋째, 주를 앙모하는 자는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루하지도 짜증나지도 아니하고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 주부들의 반복되는 삶,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 한편 생각하면 얼마나 싫증나고 짜증스럽겠습니까? 이런 답답함이 심각해지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직장인들의 매일 반복되는 삶, 과중되는 업무와 어려운 문제들, 상사의 잔소리 등이 얼마나 고달프고 짜증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앙모하는 자는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합니다” 지루한 일상성에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충실히 감당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일을 할 때에 감사가 나오고, 가사 일을 할 때도 찬송이 나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보람을 느끼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고 만족하게 살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이든지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좋은 조건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이 받는 고귀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의지할 때 주께로부터 이런 은총을 공급받는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앙모하는 자들은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감사와 생기가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결코 추상이 아닙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된 생활이고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설 믿어서 그렇지 온전히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런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매일 삶 속에서 행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는 새 힘, 어떠한 고난과 어려운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독수리같이 높이 비상할 수 있는 꿈과 희망이 넘치며 날로 향상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는 이 같은 축복을 받을 거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Nyskcian들이여 어느 때인들 우리가 하나님 앙모하는 생활을 소홀히 하겠습니가 마는 이와 같은 때에 더욱 주님을 앙망해야 하겠습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영적 독서를 하면서 주님을 앙망합시다. 독수리의 올라감 같이 올라갈 것이요, 달음박질해도 곤비치 아니할 것이요,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입니다.
- 부족함이 없는 삶
시편 23:1-6 서론: 3월 첫 주일부터 교회력으로 사순절의 기간이고, 교회적으로는 전심방 기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님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기억하였고 한편 주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만이 얻는 축복입니다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라 요한복음21:15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우리를 ‘내 어린양’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양이며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 되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벧전2:24).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주님께 돌아온 것이 구원 곧 ‘나음’이며 이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심으로 되어진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의 ‘나음(구원)’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예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이시되 영원한 목자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심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닙니다. 시간과 상황과는 무관한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언제나) 나의 목자시니( y[iro hw:hy] -야외 로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2.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선하신 목자에게 속한 양들은 부족이란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된 뒤로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서는 구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있다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인해 주님의 긍휼과 도움을 구할 뿐입니다. 다윗은 2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조용한(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은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모든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양식을 공급하셨고,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시므로 갈함을 채우셨고, 가로막는 대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10)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3.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십니다 양이 풀을 배불리 뜯고 시원한 물을 만족히 먹고서 쉬고 나면 이제 양은 마음도 기쁘고 몸에 힘도 얻게 됩니다. 그는 먼 길, 자기들의 우리까지 능히 걸어 갈 수가 있게 됩니다. 물론 목자는 양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며 보살핍니다. 이처럼 주님은 길 잃어 방황하며 병들었던 우리가 주께로 나아올 때 우리를 치유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맑은 물로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먹여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양식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따르도록 영혼이 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된 것은 버리고 성숙한 자로 성장하며 신령한 제사장으로서 교회와 사회와 가정에서 성도의 합당한 삶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려움과 힘겨움이 있는 삶이지만 세상에서 빛 된 삶으로 살며 능히 저 천국에 이릅시다. 결론: 주님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궁핍과 위험을 만나도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어린양들이 선한 목자를 기뻐함 같이 우리도 다윗처럼 그의 노래를 부릅시다.
-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살전5;17 기도는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맨하탄에 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세계적인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인파가운데서 시간이 되면 자리를 펴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슬렘들을 보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대인들을 보면 벽을 향하여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구요 티벳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차안에서도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 힌두교 모슬렘 심지어는 샤머니즘 무당들도 귀신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주문한다 ,예불,주술,예문한다 등 저마다 독특한 기도의 형태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이며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정의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챤의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긍정하는 행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산교제 생활의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살전5:17) 특히 크리스챤이 알야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령을 넣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가거나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거나 그분에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기도로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요 영혼에 호흡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하는데(요4장)예배하려면 기도는 필수적이며 그 이유는 기도로서 내가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자가 예배할 수 있고 살아 있는자가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죽은 시체라면 예배할 수도 예배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호흡을 하고 있어야 하며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에 호흡을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Nyskc에서 가장 먼저 살아 있어야 됨을 강조하기 위해 NEWLIFE 기도를 가장 앞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다른 종교의 기도는 자기 본위적이며, 맹목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을 추구하는데만 추구합니다 그것이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영혼의 호흡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는데 인간이 호흡을 하지 않으면 죽는것이기 때문에, 바로 신앙도 기도하지 않으면 죽기때문에 쉬지말고 기도하라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것을'눅18:1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항상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육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영의 인간인 속사람이 있습니다. 이 속사람은 기도라는 호흡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호흡이라는 관점에서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호흡은 생명체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생명을 지닌 존재에 있어 호흡은 그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것 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방법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다 호흡을 해야만 살 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호흡이 1분 이상 멈추게 되면 산소 결핍으로 인하여 뇌가 손상되고, 3분 이상만 되면 뇌와심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고 봅니 다. 그래서 죽음을 가르켜 숨을 거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 2:22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더불어 영혼이라는 생명적인 요소가 있기에 이 생명은 이 육체와 같은 원리로서 생명이 유지 되는데, 또다른 영의 양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만나를 먹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또 호흡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2. 호흡에는 좋은 공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필수적 입니다.사람은 호흡에 있어 참으로 예민 합니다. 공기중에는 산소와 질소가 일정비율이 섞여 있는데 이것의 조화가 조금이라도 깨어지면 사람은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됩니다. 저는 기관지가 약하기 때문에 특별히 공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이 나타나는데, 우리 거듭난 영혼들도 마찬가지로 영혼의 호흡에 예민하게 반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의 공기로 질식할 것만 같은 성도들이 하는나라의 신선한 공기를 섭취하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가령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를 대주면 살아나듯이 세상의 죄로 오염된 풍조속에 성도의 영혼이 염려 근심 슬픔 낙심감에 질식되게 될때에, 기도하면 새로운 기쁨 소망 힘을 성령께로 부터 공급받게 됩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영혼은 시들어가고 있고 결국은 죽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대화 시99:6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기도조차 무엇을 뜻하는지 그런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성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 합니다. 주문 예불 이런것이 무슨뜻이건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리안에서 인격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른 주술을 외우므로 하나님께 기도가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종일 바알 바알 바알 하면 몸을 상하게 하고 춤을 추었던 것을 보게 됩 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 대화하자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화를 할때 인격자와 인격자와의 대화는 아주 쉽게 됩니다. 즉 쌍방간의 대화가 부드럽게 됩니다.서로가 통하게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를 않기 때문에 결국은 시끄러운 소리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라디오 채널이 맞지 않을때 시끄러운 잡음이 나오는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죄가 있으면 채널이 맞지 않습니다.채널이 맞지 않으니까 통하지 않고 통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커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니까 진실한 마음이 아닌 외식적으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상대의 마음속을 잘읽을 수 없으나 우리 하나님은 中心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과의 대화는 깨끗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진실이없는 입술만의 기도는 받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잘못됨을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기도는 정직과 진실성이 없는 기도라 무엇을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하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듣는 순종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기도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다른 종교는주술적이거나 정성을 열심이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기도가 대화라고 한다면 그 대화의 상대가 누구입니까? 바로 창조주요 우리의 주이시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서 하나님을 내 뜻으로 설득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 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기도시간을 갖게되면 기도를 깊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게 될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마게도냐로 보내셨습니다. 바울이 병낫기를위해 기도했지만은 그 병이 그에게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는 간구 입니다. 세번째로 문제 해결의 열쇠 렘 33 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는 성도들이 인간적인 지혜와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앙적 삶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열쇠 입니다. 예레마야서 '비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비밀한 말씀입니다. 지식으로 받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는 말씀이 머리좋은 사람이 믿음이 좋다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성경박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잘못된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성도의 힘으로 해결할 수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약합니까? 하루살이 에게도 눌려죽을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속에서 갈피를 잡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싲대에 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는 올바르게 살아갈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므로 우리의 이웃의 마음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룽과 실라가 옥에서 기도할 때 하늘이 열리니까 옥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죄수들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옥사장의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기도해야겠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마음이 기도로 열려져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 합시다. 복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 합시다. 부흥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 합시다. 그리하여 지역의 구원의 방주가 되고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진실한 마음 간절한 마음 우리속에 죄가 있으면 듣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기도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다 같이 기도 합시다. 아 멘
- 새해엔 예배 성공하며 삽시다
(창4:1-7) 가인은 예배드리고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 망한 게 아니라 예배를 잘못 드려서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잘못 드렸다는 게 뭡니까?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고 변한 게 없는 예배자. 오히려 마음에 품고 있던 분노가 드러났고 그 분노로 동생을 죽인 예배자. 예배 잘못 드린 겁니다. 오늘 성경은 사람이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평생 예배드리는 사람 아닙니까? 나름대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째서 이 예배가 실제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새해엔 예배 성공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3-5절을 봅시다. 예배의 성공자는? 1. 예배를 통해 죄를 해결 받는 예배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물리치는 거짓된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을 봅시다. ‘가인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제물은 그 다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로 인간의 죄를 덮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엔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벌거벗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엔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부끄러움, 수치를 가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한 짐승이 죽었구요. 참된 예배에는 반드시 그 안에 죄를 가리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피를 흘리든지, 가죽으로 덮든지 인간의 죄를 덮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주신 방법입니다. 아벨은 짐승을 잡았습니다.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 앞에 태웠습니다. ‘하나님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버림받은 죄인입니다.’ 이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적어도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 깨끗하게 씻기면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5-7절을 봅시다. 예배의 성공자는? 2. 분노를 이기는 예배자.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안색이 변했습니다. 분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는 겁니다. ‘다시 하나님 얼굴 보나 보자’ 이 마음 입니다. 여러분. 지금 가인은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한테 그랬어? 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정당하게 나를 대하지 않을 때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셨다면? 반드시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바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됩니다. 분노가 생겼습니다. 분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없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노를 해결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할 이유가 없고 선을 행하면 분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에 맞게 하나님께 나가는 것, 다시 말해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습니다. 그래야 죄가 해결됩니다. 아무나 자기 방법으로 예배 드려선 안 된다고 하십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우리의 죄를 해결할 구원의 길은 여인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그 분은 장차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다스릴 책임을 가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책임?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게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고 유일한 방법 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기도로 나아가십시오. 교만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달라집니다. 주위 사람이 달라져 보입니다. 7절을 봅시다. 예배 성공자는? 3. 죄를 이기는 예배자. 이 세상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가인의 후예와 똑같은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아벨의 후손이 있습니다. 그게 예배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죄제사와 화목제사를 드립니다. 속죄제사는 죄를 해결하는 제사입니다. 먼저 죄가 해결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화목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죄 용서의 기쁨과 하나님과 교제의 더 큰 기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 복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 용서와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그 놀라운 복은 예배를 통해 받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의 예배 포기했다면 죽을 이유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살아있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예배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죄 용서가 있는 예배, 분노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예배,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를 통해 죄를 이기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원고출처 nyskc.org 최고센목사님
- 제 3 과 하나님의 목표:단체의 사람(God's Goal-A corporate man)
제 3 과 하나님의 목표 : 단체의 사람(God's Goal-A corporate man) 엡 3:9-11, 1:22-23, 2:10, 19-22 Ⅰ. 교회 - 그리스도의 몸-엡 1:23 The church-the Body of Christ-Eph. 1:23 Ⅱ. 하나님의 걸작품-엡 2:10, 19-22 God's masterpiece-Eph. 2:10, 19-22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Ephesians 1:22 And He subjected all things under His feet and gave Him to be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걸작품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좀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이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을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많은 개개인들이 아니라 한 단체의 사람 이다. 단체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알다시피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독립된 개개인들이다. 어떻게 단체의 사람 같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Ⅰ. 교회-그리스도의 몸 지난 과에서 우리가 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은 어떠한 일이 아닌 하나의 인격, 즉 하나님 자신이다. 이 생명을 취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한 인격을 우리 안으로 취하는 것이다. 이 많은 개인적인 사람들이 한 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충만될 때, 그들은 하나의 단체적인 하나님-사람(God-man)이 된다. 더이상 개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 한 단체의 사람의 많은 부분들, 즉 그리스도의 몸의 많은 지체들이 된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몸 안에 유일한 하나의 생명, 즉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학교에 갈 때, 여러분의 전 인격이 가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여러분의 전 인격이 그것을 한다. 여러분은 모든 일을 일률적으로 하는데, 그것은 여러분 안에 두 인격이 아닌 오직 한 인격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떠하신가? 그분 역시 하나 안에 계시며, 그분의 목적은 하나 안에서 표현되시는 것이다. 수많은 개인적인 사람들이 그분을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들은 그분과 하나되고,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라고 불리게 된다. 영원 미래에서 이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이라고 불려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단체의 사람이라고 우리가 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이 에베소서 3장 9-11절을 읽는다면, 교회란 많은 개인들이 구원받은 후 생긴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바로 교회를 위해서였다. 그것은 영원 전에 계획되었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받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교회는 출현되었다. 요한계시록 21, 22장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와 거처로서 영원 안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그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충만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만의 일만을 관심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그분 안에서 함께 건축되어져가는 많은 개인들이다. 이 하나의 생명 안에 살고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한 형상을 가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한 표현이며, 또한 그분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한다. Ⅱ. 하나님의 걸작품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이 단체의 사람, 곧 교회는 모든 하나님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교회가 하나님의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모든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는 하늘들이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이 땅도 교회와는 비교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유일한 갈망이다. 교회는 영원 전부터의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경륜 -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의 산물이다. ▲ 질문 ▲ 1.[한 단체의 사람]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한 단체의 사람이란 독립된 개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 거듭난 믿는이들이 단체적으로 하나의 사람임을 의미한다. 한 단체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된다. 개인적인 사람들이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충만될 때, 그들은 하나의 단체적인 하나님-사람(God-man)이 됨 2. 에베소서의 어느 구절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후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까? 에베소서 3:9-11 3.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church)]라는 말을 들을 때 생각하는 것과 에베소서에 계시된 교회를 비교해 보세요. 두가지 견해가 어떤 공통된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한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또 조금 진보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부르심 받은 무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으로 맞다. 그러나 우리는 더 진보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걸작품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이며, 이 그리스도의 몸은 새 예루살렘으로 총결될 것이다. <교회> 1) 그리스도의 몸 - 수많은 개인적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들은 그분과 하나되고,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 된다. 2) 하나님의 걸작품 -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 이 단체의 사람, 곧 교회는 모든 하나님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다. 4. 엡1:22-23, 2:10을 암송하세요.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Ephesians 1:22 And He subjected all things under His feet and gave Him to be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23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the One who fills all in all.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phesians 2:10 For we are His masterpiece, created in Christ Jesus for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beforehand in order that we would walk in them.
- 제 2 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God's Full Salvation)
제 2 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God's Full Salvation) Ⅰ. 하나님의 선택- 엡 1:4, 롬 9:11-13(God's selection - Eph. 1:4, Rom. 9:11-13) Ⅱ. 하나님의 예정- 엡 1:5, 롬 8:29, 30(God's predestination - Eph. 1:5,Rom. 8:29, 30) Ⅲ. 아들의 명분-하나님 선택의 목표- 요 1:12, 롬 8:23(Sonship-the goal of God's selection Jn. 1:12, Rom. 8:23)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인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요 1:12> 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 8:29상>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Ⅰ. 하나님의 선택(God's selection)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분은 수억의 사람들로부터 얼마를 뽑아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선택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을 창조하시기 전에 어떠한 사람들을 미리 선택해 놓으셨다. 아마 여러분은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성경은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분은 여러분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유능한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다만 당신을 선택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또 그것이 그분의 큰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그분이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분의 미리 아심(foreknowledge)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태어날 것을 아신다. 로마서 9장 11절은 야곱의 이야기로써 이 예를 들고 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 그가 선악을 행하게 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그의 형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그분의 첫 번째 축복이며, 이에 대하여 우리는 그분께 깊이 감사해야 한다. Ⅱ. 하나님의 예정(God's predestination) 우리를 선택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하다(pre- destinate)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에 앞서서 미리 점찍어 두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가 그분의 소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에게 표식을 찍어 두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위에 찍힌 표식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실 수 있고, 사탄도 또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분을 우리 속에 담아서 표현하도록,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미리 점찍음을 받은 자들임을 하나님은 아신다. 사탄도, 천사들까지도 알고 있다. 우리의 체험에서 보면,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기를 기뻐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그분은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동반하고 우리를 이끌어가실 그분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아들의 명분 - 하나님의 선택의 목표 (Sonship-the goal of God's selection)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목표는 아들의 명분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 아들의 명분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성숙과,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상속받을 위치가 그것이다. 어린 아이는 그의 아버지의 생명을 갖고 있지만, 그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에게 주기로 예비한 모든 것을 아직은 상속받을 수가 없다. 그가 충분히 자라서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상속을 받을 수 있다. 우리도 그와 똑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고 성숙된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선택하셨다. 여러분이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면 그분의 자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그분의 자녀가 되도록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숙된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 될 때, 당신을 위해 이루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이 될 수 있고, 그에게까지 자라서 그분을 표현할 수 있다(요1:12). 인간의 타락 이후에 온 인류는 죄인들, 사탄의 아들들이 되어 버렸다(요8:44).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그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가! 비록 오늘날은 그분과 같게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선택하심 안에서, 어느날 우리가 그분의 성숙한 많은 아들들 - 그분의 표현을 위한 생명으로 충만하고, 그분을 대표하기 위한 통치권으로 충만한 - 이 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하나의 표현이 오늘날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요, 장래에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 질문▲ 1.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것으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첫째 되는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 2.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셨습니까? 언제 : 창세 전(우주가 창조되기 전) 어떻게 : 미리아심에 따라 왜 : 그분의 선한 기쁘심 때문에 3.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선택하심은 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정하심은 어떤 목적에 앞서서 미리 점찍어 두다 라는 뜻이다. 즉 우리의 운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미리 정해진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기를 기뻐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그분은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동반하고 우리를 이끌어가실 그분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빨리 순종하여 그분의 아들됨에 속히 이르러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명분(Sonship) 6.[아들 됨]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들의 명분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성숙과,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상속받을 위치가 그것이다. 7.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됨 : 주님을 영접함, 즉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음으로-요1:12,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은 다만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성숙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숙한 아들들이 된다. 8. 엡1:4-5, 요1:12, 롬8:29 을 암송하세요. <엡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인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 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지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요 1:12> 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 8:29상>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제 1 과 하나님의 구원계획(Salvation in God's plan)
제 1 과 하나님의 구원계획(Salvation in God's plan) Ⅰ. 영원과거에서 하나님의 계획(God's plan in eternity past) Ⅱ.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 - 엡 1:5,9(God's good pleasure - Eph. 1:5, 9) Ⅲ.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 엡 3:9-10(God's eternal purpose - Eph. 3:9-10) Ⅳ. 하나님의 경륜 - 딤전 1:4, 엡1:10, 3:2(God's ecomomy - 1Tim.1:4, Eph.1:10,3:2) Ⅴ. 하나님의 대적 (God's enemy) Ⅵ. 하나님의 구원 (God's salvation)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 하신 것이니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창 1:26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과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무엇으로부터, 또 무엇 안으로 우리는 구원받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왜 그분만이 홀로 구원하실 수 있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는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들의 목록이다. 이 책은 이 모든 질문에 답해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더 많은 것들을 말해줄 것이다. 첫 과에서는 여러분이 전에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영원 전에 일어났던 일을 다루고자 한다. Ⅰ. 영원과거에서 하나님의 계획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분 홀로 계실 때에, 그분의 선한 기쁘심, 곧 마음의 갈망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한다. 이 기쁘심을 따라 하나님은 하나의 계획, 곧 하나의 뜻을 세우셨다. 성경은 이것을 영원한 목적 이라고 부른다(엡3:11). 또한 하나님은 이 영원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안배해 놓으셨다. 성경은 이 안배를 하나님의 경륜 혹은 하나님의 분배 라고 부른다(딤전1:4, 엡1:10,3:2). 그래서 성경은,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 영원한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경륜을 가지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 Ⅱ. 하나님의 기쁘심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여러분과 내가 우리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일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이 선한 기쁘심을 따라 이루어졌다. Ⅲ.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른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한 무리의 사람들, 즉 단체의 사람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그분의 통치권을 갖기를 갈망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하나님의 경륜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 즉 이 목적을 이루는 그분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단체의 사람을 얻는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을 생명으로 사람 안에 분배하심에 의한 것이다. 사람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Ⅴ. 하나님의 대적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그분의 대적인 사탄이 들어와서 사람을 속이고 사람속에 사탄의 죄의 생명과 본성을 주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파괴하는 죄의 행위와 죄의 본성이 가득한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Ⅵ. 하나님의 구원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하실 수 없다. 사람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분의 목적을 바꾸려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를 시작하셨다. 이 역사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다. ▲ 질문 ▲ 1.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선한 기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것을 좋아하시고, 또 그것을 하실 때 기뻐하십니다. 그것을 하실 때 즐거워합니다. 2.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 그분의 목적 그리고 그분의 경륜에 대하여 성경이 의미하는바를 설명하기 위해 당신 자신의 생활에서 예를 들어 보세요. <예1>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의 건강을 돌봅니다.(이것은 선한 기쁨입니다.) 이러한 선한 갈망에 따라 자녀들을 잘 먹여서 건강하게 하려는 목적을 세웁니다. 자녀가 건강하면 얼굴에 빛이나고 어머니의 목적은 성취 됩니다.(이것이 선한 기쁨에 따른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시장에 가서 맛있는 재료를 사고 요리하여 자녀들을 먹입니다.(이것이 경륜임) 3.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한 무리의 사람들, 즉 단체의 사람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4.[영원한]이라는 단어를 정의하세요. 시간에 있어서 시작과 끝이 없음, 공간에 있어서 광대하고 측량할 수 없고 제한이 없음, 질에 있어서 완전하고 온전함, 파괴할 수 없고, 썪지 않고, 결코 변하지 않음. 5. 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영원하다고 말합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경륜]이라는 단어를 정의하세요.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로 오이코스+노모스의 합성어입니다. 오이코스는 집, 가정이라는 의미이며, 노모스는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합치면 가정 법, 가정 행정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생명으로 사람 안에 분배하심에 의한 것이다. 7. 엡1:9, 3:11, 창1:26을 암송하세요.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 하신 것이니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Ephesians 3:11 According to the eternal purpose which He made in Christ Jesus our Lord, 창 1:26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Ephesians 1:9 Making known to us the mystery of His will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which He purposed in Himself
- Worship(예배와 교회 생활)
예배와 교회 생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로마서 12 : 1)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이요"(골로새서 1 : 18) 1. 예배 예배의 정의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께 대하여 존경과 숭배를 표현하는 행위를 말하며 예배는 신앙생활의 생명체가 되는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통해 계약공동체가 그 생명을 이러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이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시편 29 : 2) -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4 : 23) - 예배자의 신앙이 성장되기 위해 (에베소서 4 : 11 ∼ 15) 예배의 장소 - 성전 (사도행전 1 : 13) - 생활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생은 그 자체가 예배적인생이었다) <로마서 12 : 1> 예배의 요소 - 찬송 - 말씀 - 기원 - 헌금 - 신앙고백 - 교회소식 - 기도 - 축도 예배의 방법 - 존경과 감사 (시편 95 : 1 ∼ 3) - 참회와 용서 (시편 86 : 5, 시편 51 : 1 ∼ 3) - 신령과 진정 (요한복음 4 : 24) - 거룩함 (시편 29 : 2) ※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이 예배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롬12;1-2) 예배의 종류 -주일 낮예배 -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 금요 철야예배 - 새벽예배 - 구역예배 2. 교회 교회 교회(에클레시아 : 불러냈다)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중을 뜻합니다. 따라서 교회건물은 예배당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이들이 모이는 단체를 교회라 합니다. 교회의 주인 교회의 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로새서 1 : 18) 교회가 하는 일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4 : 23 ∼ 24) -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 주님이 명하신 세례와 성찬식이 집행됩니다. - 성경을 가르칩니다. (디모데전서 4 : 13, 마태복음 9 : 35) - 복음을 전합니다. (마태복음 28 : 19 ∼ 20, 사도행전 1 : 7 ∼ 8) - 성도간에 교제를 합니다. (사도행전 2 : 42) - 교회와 이웃에게 봉사를 합니다. (베드로전서 4 : 10) 3.교회생활 주일 (시편 118 : 24) - 주일이란 어떤 날입니까? -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셨습니다. (창세기 2 : 2) - 육신의 휴식과 영혼의 예배를 위하여 우리 인간들 에게 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 예수님께서 주일(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마가복음 2 : 27 ∼ 28) -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 하나님께서 주일(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 : 8)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쁨과 평안으로 안식해야 합니다. (시편 118 : 24) 예배 * 예배란? - 창조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 : 24) -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 : 1) 찬양 (시편 113 : 1 ∼ 2) * 자세 - 경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골로새서 3 : 16) - 마음을 다하여 불러야 합니다. (시편 9 : 1) - 즐거움으로 불러야 합니다. (시편 9 : 2) 헌금 (마태복음 6 : 20) 1)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 :21)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골로새서 2 : 6 ∼ 7) 2) 헌금을 드리는 자세 - 미리 준비하여 즐거이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 Worship(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2.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요한복음 4장 24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날 예배 드릴 때 거의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하고 겸손하며 진실된 마음 자세, 한마디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내적인 마음 상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마음 자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영적’ 이해는 비단 현재 우리 교계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서구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성어린 자세는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갖춰야 할 것임에는 두말 할 나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하는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이 본래 그러한 뜻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요한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표현만큼 오래도록 본래의 의미에서 왜곡되게 사용된 성경 말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내적인 혹은 영적인 하나님 섬김(?) 언급했듯이 지금까지 대체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난 표현을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 혹은 인간 마음의 영적 상태와 관련시켜 해석해왔다(spiritualistisches Verst ndnis).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에 젖은 서구인들의 이해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헬라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특별히 고대 헬라 신비주의와 스토아 사상 혹은 영지주의의 이해에 따르면, 이른바 유치한 원시종교의 외적이며 육적인 예배 이해와 대립된 것으로, 영적이고 신비적인 예배를 참된 예배로 간주하였다. 1온전한 예배란, 제물을 바치는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는 진실된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이미 구약성경 여러 구절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 1장 11~1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개역개정판). 2 또한 헬라 유대 종교철학가로 통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von Alexandria, 대략 BC 20~AD 50년경)에게서도 그런 표상을 찾을 수 있다: “유일무이한 제물로서 진리를 바치는 마음의 섬김은 진실되다”(det. 21), 혹은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마음의 경건성을 떠나 진실되며 신성한 제물이 있단 말인가?”(Vita Mos. II, 108).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언급하는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구약/유대적인 물질주의적인 예배 표상에 대립된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영적 예배(곧 우리의 인간적 정성과 종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오랫동안 이해해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계몽주의 이래로 더욱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긴 세월 동안 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이해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한글 ‘개역성경’도 그와 같은 영향을 받아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정’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를 번역한 것인데, 인간 마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한다. 또한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전치사 ‘엔’(en)을 우리말로 바꾼 것인데, 수단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배하는 자가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즉 ‘개역성경’에 나타나는 번역은 예배를 완전히 내적인 의미로 이해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 3 ‘공동번역’(1997/1999년)에는 그리스어 원어 ‘프뉴마’와 ‘알레테이아’가 전치사 ‘엔’과 합하여 완전히 부사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했다. 이로써 소위 ‘영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예배 드리는 자가 갖춰야 할 인간적인 경건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해석은 헬라적인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편, 요한복음 4장 24절을 내적 혹은 영적인 의미의 예배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서구 학자들의 주석 가운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고데의 요한복음 주석에 나타난다. 고데는 요한복음 4장 23~24절과 관련하여‘영’(Geistigkeit)과 ‘진리’(Wahrheit)을 미래에 있을 예배의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서 영은 인간적인 영혼(=정신)의 최고의 활동(die hochste Lebenstatigkeit der menschlichen Seele)을 가리킨다. 이로써 영혼은 신적인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곧 경건의 장소요,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며, 진실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소이다. … 이와 같은 첫 번째 특징은 새로운 예배의 내적인 세력을 묘사한다. - 두 번째 특징인 진정은 첫 번째를 보충한다. 영혼의 내적 성소에서 거행되는 예배야말로 유일한 참된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대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영혼 가운데 또한 진정 가운데라는 이 두 표현은 단지 양태(die Art und Weise)와 관련된 것이다.” 4 또한 하이트뮐러(W. Heitmuller)는 이렇게 해석했다: “영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혹은 민족과 제의의 경계를 넘어서 특정 지역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인, 따라서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다.” 5 혹은 바우어(W. Bauer)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신성한 시간과 장소와 제의와 결부된 육(Sarx)의 영역에 속한 모든 멍에에 구속됨이 없이 ‘진실된’ 기도자(wahrhaftige Anbeter)는 순수히 내적이며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geistige Gottesverehrung) 것이다.” 6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인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이 모든 영적 혹은 내적인 해석은 본래 요한이 의도했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Ⅱ. 요한의 사고에 따른 이해 요한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4장 1~26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나누는 대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가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요한은 처음부터 강조한다. 한 유대인 남성과 한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4장 24절의 문맥 이해 어느날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옛날부터 유래한 한 우물이 있었는데, 행로에 지친 예수께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제6시(=정오)가 되자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고,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 대화가 벌어지게 된다.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이방인과의 혼혈족이고,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었다. 9절에 예수께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로부터 돌아온 이래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을 청하자, 그 여인은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리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메시아 계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누군인줄 알았더면 (역으로) 네가 나에게 생수를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이 도대체 ‘생수’(=샘솟고, 흐르는 물)를 어디서 얻겠는가 하고 11절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질문을 한다. 아마도 여인은 예수께서 다른 우물을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러한 종류의 물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물임을 설명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고 우회적으로 말함으로써,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갈증을 해소시키는 마법의 물과도 같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4절)을 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16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각도로 대화를 돌린다.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꿰뚫고 있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엿보게 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여자의 과거사를 정확히 밝히게 되고(18절), 그러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한다(19절). 이어서 여인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언급한다(성전을 예루살렘에 갖고 있는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성소를 그리심 산에 세웠다). 21절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대답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함으로써, 두 장소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예배 드릴 때가 지금 이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온전히 예배 드릴 때’란, 바로 예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와 함께하는 현재에는 예배를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2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런 예배를 드릴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참된 예배가 바로 지금 자신과 더불어 성취되고 있음을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때’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오신 때, 바로 지금을 가리킨다. ‘이때’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는 문장의 맨 앞에 놓여 강조되고 있다. 이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24절 말씀을 예수께서 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설명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린다(25절). 그러자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계시한다(26절). 2. 요한이 의미하는 ‘영’과 ‘진리’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나는 두 핵심어인 ‘영’과 ‘진리’를 요한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은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심성과 관련된 내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즉 영이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각각의 개념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요한의 ‘영’(pneuma) 이해 요한복음의 ‘프뉴마’(pneuma)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psyche)/‘마음’(nous)/‘몸’(soma)과 대립된 인간학적인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은 프뉴마를 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7 요한복음 3장 6절(“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에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세력으로 이해되는 ‘영’(pneuma)과 대립된 개념은 세상 세력을 대표하는 ‘육’(sarx)이다. 요한의 문맥에서 '신령'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제자들을 계시의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이와 같이 이해된 하나님의 영은, 보이지도 않으며 단지 그 활동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을 뿐이기에(요 3:8), 인간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요 1:18). 이 요한복음 4장 24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이 바로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1 1:5)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라는 표현 역시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요한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신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요한의 영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말로 ‘보혜사’ 혹은 ‘협조자’로 번역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복음(요 14:16f, 26; 15:26f; 16:7b~11, 13~15)과 요한일서 2장 1절에만 나타난다. 종교사적인 유래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이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특별히 법정에서 변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불러들인 자’를 뜻한다.8 즉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문맥에서 이 개념은 오직 성령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가운데, ‘진리의 영’으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은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가르치며’(cf. 요1 2:27)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 파라클레토스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26~27절은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기능으로서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능에 대해 말한다. 게다가 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믿지 않는 세상을 고소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장 13~15절에 언급된 파라클레토스는 신앙 공동체의 활동과 관련하여, 예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하는 기능에 대하여 언급한다. 2) 요한의 ‘진리’ 이해 요한은 ‘진리’(aletheia)라는 개념을 자기 특유의 신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 단어를 공관복음서 기자와 달리 훨씬 자주 사용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9 이 개념을 중요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요한이 어떠한 의미로 이 개념을 이해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된 언어 사용법에 10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의 사용법이 눈에 띈다 11첫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동사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진리를 ‘알다’ 혹은 ‘보다’(요 8:32; 1요 2:21); 진리를 ‘말하다’(요 8:40, 45, 46; 16:7); 진리를 ‘증거하다’(요 5:33; 18:37); 진리를 ‘행하다’(요 3:21; 1요 1:6); 진리에서 ‘나오다’(요18:37; 1요 3:19). 여기에서 요한이 뜻하는 ‘진리’는 계시를 나타내는 언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둘째, ‘진리’가 전치사 엔(en)과 함께 사용된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24); 진리 ‘안에’ 서다/서지 못하다(요 8:44);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다(요 17:17, 19); 행함과 진리 ‘가운데’(1요 3:8). 여기에서 ‘진리’는 전치사 엔(en)과 더불어 일종의 부사적인 표현으로 이해되지 않고,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진리의 영역은 이와 대립된 영역을 전제한다. 이를 요한은 ‘어둠’(요 1:5) 혹은 ‘세상’(요 1:10)으로 부른다. 예배란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참 예배는 말씀의 온전한 선포를 전제한다. 셋째, 진리가 마치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다(요 1:1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나는 진리다(요 14:6). 여기에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라는 한 쌍의 명사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본래 구약적인 표현 ‘헤세드’(dsj)과 ‘에메트’(tma)에 상응한다.12 하나님의 자비와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출 34:6) 요한은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파송한 것을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이해했다. 아들 파송 사건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진리’와 동일하다(요 17:17). 결국, 본질적인 의미로 볼 때, 요한의 ‘진리’가 뜻하는 것은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경우의 언어 사용법 가운데 특히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요한에게 나타나는 ‘영’과 ‘진리’란 서로 보충하는 개념으로서, 한마디로 세상적인 것 혹은 인간적인 것과 대립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과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이 표현은 요한 특유의 성령을 가리키는 칭호 ‘진리의 영’(요 14:17; 15:26; 16: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진리의 영’은 다음과 같은 표현, ‘참 빛’(요 1:9; 1요 2:9), 혹은 ‘참 떡’(요 6:32) 또는 ‘참포도나무’(요 15:1), 또는 ‘선한 목자’(요 10:11, 14)와도 상응한다. 3. 참된 예배란 이제 다시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구절 요한복음 4장 24절로 돌아가서, 요한이 의미하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참된 예배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특정 예배 시간과 장소의 극복 참된 예배란 특정한 예배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은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그리심 산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는데(요 4:20), 요한은 그것을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유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제의적 관습을 거부한다. 예배의 본질은 제의 자체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해는 요한 특유의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서 및 유대 전통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현재에 가능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참된 예배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가운데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고 강조하듯이, 하나님의 영과 아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드러난 현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곧 예배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금의 순간을 가리킨다(요 3:19; 5:25). 예배의 ‘참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순간에 제한되고 있다. 바로 그때 구원의 시대에 합당한 장소가 펼쳐진다. 참된 하나님 경외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인간이 주도가 되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예배를 특정 시간과 공간에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가속화된 예배의 형식화를 거부한다. 3) 현재 종말론적인 예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현재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현재적 종말론은 요한복음의 특징에 속한다(요 3:19; 5:25; 4:23; cf. 12:31; 16:11). 예수의 오심은 바로 종말론적인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선재한 로고스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미래 종말에 있을 사건이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다고 요한은 믿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요 4:23)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함께하신다는 근거에서 가능한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의 시간이 기다려야 할 미래에 나타날 것이 아니고, 예수의 운명 가운데 바로 지금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다. 13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은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 참된 예배가 종말론적인 현재에 가능하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4)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 요한은 그리스적인 사고보다 훨씬 더 철저한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였다.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한 분이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정의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의 차원에서 묘사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란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이 만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요한복음 3장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진술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즉 예배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삶을 이루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운 은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진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락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단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Ⅲ. 나가면서 오늘날 우리는 예배의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 너무도 집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나님은 예배시 교회 건물 안에만 임재하고 계신 듯이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통하여, 참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주로서 바로 지금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차원에서, 성과 속(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날을 성스럽게 여기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속되다고 천대받던 창녀, 세리, 어린아이들과도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주일과 평일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마치 주일처럼 귀한 날로 여기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은 바로 성스러운 주일과 다름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평일에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산 예배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나의 주로 고백하는 믿음 가운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삶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두 무릎을 꿇는 삶인14 것이다. 참된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전적인 자비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다양한 예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이다.
- Worship(1. 예배란 무엇인가?)
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존재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배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거하도록 인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은 천국의 보좌가 있는 바로 그곳까지 갈 수 있으며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Worship)란 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굽히고 하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자녀로써 마음과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경배드리는 최고의 가치있는 일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에게 스스로 임재하셔서 우리를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찬양과 기도와 헌신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시간을 보낼 때 세상의 것들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멀리 계시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새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여광으로부터 우리들을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예배를 바로 이해하고 바른 예배 정신으로 예배를 드릴 수만 있다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새롭게 또 더욱 깊은 교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입니다 1.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피조물의 최고의 행위입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최대의 봉사(service)활동입니다. 2. 예배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1) 신령 2) 진정 3.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부자지간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 씀씀이의 깊이와 넓이와 깊이를 알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면 풍성한 유익을 얻습니다.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가 주는 이 같은 풍성한 은해를 깨닫게 되면 가슴이 터질 것입니다. II.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1.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기 위해서 드립니다. 시편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편50:23/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 성도들이 거룩한 구별된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24:3-4/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한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아니한 자로다 3. 구원받는 수를 더하십니다. 사도행전2:46,47/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III. 예배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찬 송: 찬미의 제사 - 감사, 회심, 기도, 간증 등을 노래로 나타냅니다. 히브리서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시편100: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2. 기 도: 향이 가득한 금대접 - 감사, 고백, 간구, 중보 등을 언어로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3. 말 씀(설교): 하나님께서 대언자(설교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78:1/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4. 헌 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내게 베풀어 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나는 당신들이 돈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들의 그 회심을 믿을 수 없다" 1)십일조정신/말라기3: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금고에 들여 나의 집에 식량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실과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잠언3:9-10/ 네 제물과 네 소산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2)헌금정신/고린도후서8:2-5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만 아니라 저희가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쫒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3)헌금정신/고린도후서9:6-7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둘 것이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4)헌금의 종류:십일조헌금,주일헌금,감사헌금,선교헌금,구역헌금,절기헌금,기타 등 5)헌금이 주로 쓰이는 곳:(1)하나님의 일들을 위한 복음사역 (2)기독교 교육 (3)선교 구제 (4)교역자의 생활비 (5)교회건축 교육기제 등 (6)교회운영 행사비 IV. 예배하는 자세 1.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3. 예배드리는 자의 태도 * 준비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질 것 * 예배시간 전에 참여할 것 *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참석할 것 * 말씀을 경청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할 것 * 회개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예배를 드릴 것 * 성경과 찬송가를 준비할 것 *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할 것 V. 예배의 종류 1) 공예배/공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함께 모여서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주일 낮예배 *주일 밤예배 *수요일 밤예배 2) 절기예배 *부활절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맥추 감사절 *추수 감사절 *성탄절 3) 기타예배 *새벽 예배 *철야 예배 *구역 예배 *가정 예배 4) 우리 교회의 예배안내: 주보 참조 당신은 예배를 통한 축복을 누리시고 계십니까? 만일 당신이 아직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결정하시고 각종 예배에 참석 하도록 하십시오.그렇게 될 때 당신은 크고 비밀한 것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언제나 초청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배는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만드신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배의 약속을 믿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신 은혜를 받으십시오
- Warming-up(제5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 5 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신분이 바뀝니다. 단순히 신분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바뀝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과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므로 과거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현재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으며, 미래에 영원한 심판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기에 행실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은총으로 거지가 왕자가 되었다면 그는 왕자의 품위를 나타내기 위해 과거의 행실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와 행동을 배우고 나타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우리가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생활의 모습을 통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신분 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장 3절)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 신분이 변합니다. 과거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사단의 자녀, 죄의 종이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 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 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장 7-8절) 교회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정결함과 순결함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음녀같이 하나님을 떠나거나(시편73:27) 세상과 벗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야고보서4:4) 3.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전입니다.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장 16-17절)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그리스도인도 당연히 거룩해야 합니다.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행실 그리스도인이 나무라면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그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인격)가 아름다운 열매(행위)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2장 46절)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돌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장 12-14절) *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장 8-9절)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며. 신자는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2.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장 13절) 세상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자기를 희생하며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방지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질 때 그 맛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3. 그리스도은 향기인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 2장 14-16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향기입니다. 향기란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 아름다운 행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나 언제든지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Ⅲ. 그리스도인의 생활 1.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사람들처럼 살아서도, 세상과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도피하거나 은둔생활을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도피도, 세속화도 아닙니다. 또한 세상과 격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지고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당할 때 승리해야 합니다.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2절-4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마귀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유혹과 시험이 그림자처럼 따르며 죄에 빠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승리가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혹 실수를 했더라도 구원을 변경시키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①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는 자입니다. (벧전5:8, 요일3:8) ②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입니다. (엡2:2) ③ 마귀는 결국 지옥에 들어 가게 됩니다.(마25:41) ④ 세상의 유혹을 이겨야 하며,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요일5:17, 요16:33) ⑤ 이러한 시험을 이기려면, 말씀으로 무장하며 (마4:4) 깨어 기도하고 (벧전5:8-9), 전신갑주 를 입어야 합니다. (엡6:11-17)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상으로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향락에 도취되어서는 안되고, 항상 겸손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능력의 주님을 더욱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관계에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사탄과의 관계에 시험에 들지 않아야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 순종하는 삶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일날 교회에서만의 관계가 아니라 평상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명기6:4-9, 마태복음22:37) 2) 사람들과의 관계 : 서로 사랑 하나님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이므로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은 물론 이웃사람들과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가 있어야합니다.(마태복음22:39) 3) 물질과의 관계 : 잘 다스림 모든 물질 즉 돈이나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디모데전서6:9-10).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생각하고 사치하거나 낭비하지 말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정당하게 얻은 물질로 선한데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웨슬레 : 힘껏 벌라, 힘껏 저축하라, 기회있는 대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써라.) 4) 사단과의 관계 : 물리쳐 이겨야 함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장 7절)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시험하여 범죄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결국에 가서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자들입니다. 이 사단은 우리 인간보다 지혜가 있고 능력도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에게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쳐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마10:1) 그러므로 사단의 유혹과 공격에 두려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물리쳐 이겨야 합니다. Ⅳ. 그리스도인의 전도생활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 14-15)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할 여러 가지의 일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전도하는 일로 한 생명을 구원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1) 전도자의 자세 :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자기 자신을 가르쳐 복음에 빚진 자라고 말하면서 이 빚을 일생동안 갚아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전도하는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전도자의 자세는 죄악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는 일입니다. 2) 전도는 왜 해야 합니까? 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입니다.(막16:15)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기에 지상명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우리들이 꼭 지키기 위하여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③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눅15:7) 전도는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맡은 자들의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도에 힘써야"(딤후4:2) 합니다. <복습문제> 1. 예수를 믿은 자의 새로운 신분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어떤 존재입니까? 3.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관계에 대해 말하시오 4. 전도는 왜 해야 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