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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울에서 바울의 삶으로(윤성수간증)

    사울과 같이 예수를 믿는 자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며 살았던 삶에서 위암이라는 다메섹 사건으로 예수를 믿고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윤성순 형제(춘천 한마음교회)의 신앙이야기를 들어보자

  • 교회

    1. 에클레시아의 의미 1. 교회론에 들어가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그것은 바른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회는 신앙인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고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하고 그 형태는 본질을 바르게 담아 나가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2천년 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교회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현실 교회란 그 본질적인 의미를 회복해 가면서도 그 형태는 시대에 걸맞게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밝혀 보고자 한다. 2. [교회]라는 말의 뜻은 ? (용어 해석) 영어의 church, 독일어 Kirche, 스웨덴어 kyrka등은 희랍어 kyrike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로서 에클레시아(ekklesia)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kyrike(주님께 속한)를 사용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그것은 루터가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싫어하고 [공동체]라는 말을 즐겨 썼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 교회와 가까운 교회들이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뜻으로 church(영), Kirche(독), kyrka(스웨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를 중심한 나라들은 희랍어 [에클레시아(ekklesia)]를 따라서 라틴어 ecclesia, 스페인어 iglesia, 불어 eglise, 이태리어 chiesa 등등의 말로 교회를 표시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 교회들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로마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에클레시아)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개신교회는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직접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찾을 수는 있다. [카할]과 [에다]가 그것이다. [카할]은 [의논하기 위해서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회중]을 뜻하였다. [에다]는 [택함을 받아 모인 집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70인역에서는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로 번역했고 [에다]라는 히브리어는 [시나고게]라는 희랍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에는 카할과 에클레시아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모인 공동체]라는 뜻으로 굳어졌고, [에다]와 [시나고게]는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회당)으로 의미가 제한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유대인의 회당은 [시나고게]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보자.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는 본래 [일반적인 모임]을 뜻했다. 이 말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하나님의 교회][주님의 교회]등으로 말을 붙여서 종교적인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끝으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머리가 되어 주시고, 성령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심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이 세상의 어떤 권세 아래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교회는 神人共同體이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2. 교회의 근원(根源) 교회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교회의 근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그 해답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한다. 1. 교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교회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교회의 시작을 구약에서 찾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하나님의 법을 받아 계약 민족이 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모으시고 훈련시키신 후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교회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교회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직접 교회를 세우신 일도 없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는 아니다. 복음서에는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두번 나온다(마 16:18 18:17).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1백번 정도 나온다. 예수께서 세우시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마태복음 16:18에 나오는 [교회]는 현재 세우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세워질 교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활동하셨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라고 구별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과 완전히 구별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이 새로운 공동체의 핵심 인물이라고 당장에 구별하여 세우신 것도 아니다. 다만 미래의 일꾼으로 훈련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과 활동이 후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前兆)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지향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 신앙으로 다시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신다는 것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종말적인 공동체로 시작되었다. 2. 교회의 근원 교회의 근원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전부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그 모든 것을 믿는 자들에게 임하신 성령 강림까지, 총체적인 것 모두가 교회의 근원이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자기들이 믿는 바를 서로 확인하고 기뻐하며 새 언약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활동에 대한 확신을 가져오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부활 신앙이 근본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확립되면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이 정립된 것이다. 12제자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와 바울이 중심이 되어 원시 교회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은 교회의 근원이요, 머리이시며 장차 오셔서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분으로 모셨던 것이다. 3. 교회의 특징 1. 교회의 특성 니케아 신조 가운데 교회에 대한 고백에 보면 [우리는 또한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 적인 교회를 믿는다]라고 되어 있고, 사도 신조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간단히 취급하고 있다. [거룩한 공회(公會)]는 [거룩한 공교회(公敎會)],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라는 뜻이다. 사도 신조에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다른 신앙 조항은 간단히 한 두마디로 요약하는 정도이다. 니케아 신조에는 참 교회의 특성이 네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의 교회(單一性), 거룩한 교회(聖性), 보편적인 교회(普遍性),사도 적인 교회(使徒性), 이것이 참교회의 특징으로, 본질을 떠난 거짓 교회와 구별하는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2. 하나의 교회 이것은 교회의 단일성 또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시니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 도다](엡 4:4-6절). 교회의 단일성은 하나라는 숫자나 윤리적 일치나 교회법이나 제도적 일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영적 현상이다. 에베소서에서 밝힌 대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일체되심에서 비롯된다. 교회의 단일성은 제도적인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숫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다수의 지역 교회들과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교회들 안에서도 하나의 교회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다양성 속에서도 단일성과 공통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분열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의 약점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분 하나님을 바르게 모시면서 교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3. 보편적인 교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지방 교회, 지역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말하며 세계적(Universal) 교회를 말한다. [누구든지], [모든 족속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고, 자유자나 종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으며, 남자나 여자나 성의 차별이 없는 만민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고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을 무너뜨리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세운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모든 차별이 없어지게 되어서 초기 교회에서는 죄인과 종과 여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떡을 떼며 친교 하는 혁명적인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만이 보편적 교회(Catholic)라고 하고, 개신 교회는 자신들이 진정한 참 교회라고 한다. 카톨릭은 잡동사니가 되었고, 개신교회는 분열의 죄를 계속하고 있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나 계급 의식이 있는가 하면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들의 죄악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빈곤의 차별이 있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주의나 애국 신앙으로 격하시키는 실수도 계속하고 있다. 주 안에서 만민이 평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형제 자매가 되는 만민의 교회, 전체의 교회, 세계적인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4. 거룩한 교회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 3:15-16).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존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 공동체이며, 성령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피조물이며,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시고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면 교회는 흠도 없고 깨끗한 공동체인가? 아니면 온갖 죄악이 아직도 우글거리는 죄많은 공동체인가? 우리가 솔직히 고백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분명히 죄인들이 모인 죄인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갖 약점들이 모여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면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서 죄만 저지르고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수용소와 같은 곳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임에는 틀림없으나,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떠나고, 죄문제를 해결하여 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죄를 책망하고 죄를 회개하고 죄의 용서가 있어,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거룩한 속죄의 역사가 일어나는 성삼위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교회의 거룩성을 고집하면서 죄인들을 내어 쫓음으로 거룩한 교회를 만들겠다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누가 죄많은 사람인가를 구별할 수 없다. [거룩한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나 법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께서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요, 터전이요, 감독자이시기 때문에 근본이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죄의 역사를 통해서 죄인들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세상 어떤 공동체와도 구별되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거룩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이면서도 거룩한 교회이며, 거룩한 교회이면서도 이직도 죄가 남아 있는 인간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여져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레 11:45).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굴복 당하거나 파멸될 수 없는 끈질긴 영속성이 있으며(마 16:18), 어떠한 죄악의 세력에도 감염되어 소멸되지 않도록 진리의 영께서 보존하고 계시며(요 14:16-17), 교회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상처를 입고 신앙이 약해지고 흔들린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변질될 수 없는 확실한 진리 위에서 있다(딤전 3:15).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의 양이며, 하나님의 자식이다. 교회가 아무리 잘못되어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며, 탕자가 돌아올 때 기쁨으로 영접하시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어쫓지 않으신다. 거룩한 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자기를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 가야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말씀이 선포되며 회개와 속죄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며, 죄인이 거듭나서 물과 불로 세례 받는 수가 많아지며, 거룩한 성례전이 집행되며, 성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변화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야 한다. 5. 사도적인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았으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형제의 발을 씻기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모든 일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일하다가 대부분이 순교하였다. 사도들은 다시 사도라는 사람들을 세우지 않았으나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직분, 곧 사명을 교회에 위임하고 떠났다. 그래서 교회를 「사도의 교회」라고 하지 않고 「사도적인 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도 적인 사역(使役)만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들의 직분과 사명을 누가 계승하는 것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베드로에게 이양되었고 베드로는 교황에게 권한을 물려주었으며, 교황은 각 지역의 주교에게, 주교는 지교회 신부들에게 이양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셨고 베드로는 교황에게 맡겼으므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권을 물려받은 유일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요 사도들의 교회이며, 교황의 교회는 주교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주교가 인정하지 않는 교회, 신부가 가지고 있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인가? 개혁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사도들이 죽으면서 그 권위와 사명과 직무를 누구에게 물려주었는가? 마태복음 16장 16-19절 말씀을 카톨릭 교회에서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로 삼고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사도로서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어느 누구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긴 것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운 교회에 사도들의 모든 사명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과 사도들의 봉사에 대해서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명실공히 사도들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것은 사도적 계승이라는 실질적 연속성이다. 이 연속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연속성이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 역사 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사도들이 세운 그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전]이었으며, 성령께서 사도들의 교회와 사도 이후의 교회를 연결하는 영적 계승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사도들과 사도 이후의 교회와의 실질적 연속성을 가능케 하셨는가? 첫째는, 사도들의 증언,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전하여지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서 그 말씀에 복종하고 살아가는 일을 통해서 사도적 계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는, 주께서 사도들에게 분부하신 봉사를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 수행한 것처럼, 교회가 사도들의 봉사의 모범을 따라 복종하며 실천할 때 사도적 계승이 가능하였다. 복음 전파, 세례, 기도, 형제의 발을 씻기고, 구제하고, 친교와 일치, 세계를 향한 선교와 봉사, 인류를 위한 구원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다할 때, 진정한 사도 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도적 권위는 그의 말씀과 봉사에 있고, 사도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6. 교회가 하는 일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교회의 기능이나 사명이나 사역을 묶어서 말한다면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안으로 행하는 일과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하는 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그 본질적 의미가 세상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굳이 구분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1. 교회 안에서 하는 일 교회가 자체 안에서 행하는 일은 말씀 선포(케리그마), 말씀 가르침(디다케), 성례전 집행(유카리스트), 친교(코이노니아), 봉사(디아코니아) 등이다. 첫째로, 교회는 말씀 사역을 감당한다. 여기에는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있다. 말씀 선포(케리그마)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선포하고 용서를 약속하는 사역이고 말씀을 가르치는 [디다케]는 말씀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히 보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성결의 생활을 가능케 한다. 둘째로, 교회는 성례전을 거룩하게 집행한다. 성례전(聖禮典)은 [유카리스트]라고 하는데 로마 카톨릭에는 일곱 가지 성례가 있으나, 개신 교회에는 [성찬과 세례] 두 가지만 성례로 인정하고 시행한다. 성찬 예식은 예수께서 친히 세우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시행하라고 명하신 예식이요(마 26:26,28, 막14:22-24, 고전 11:23-27) 세례 예식도 주께서 직접 분부하신 예식이다(마28:19). 나머지 다섯 가지는 성서적인 근거가 희박함으로 종교개혁 이후 개신 교회에서는 지키지 않는다. 성찬 예식은 주께서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신자는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2천여 년 전 실제로 역사 속에서 계셨던 주님을 기억해 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재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 떡과 잔을 받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게 된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예식인데, 그 의미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과 은혜의 언약의 혜택에 참례한다는 것과,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계약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예식이다. 셋째로, 교회는 성도간의 친교(코이노니아)를 수행한다.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됨을 공고히 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해야만 완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인종의 차별, 신분의 차별, 남녀의 차별, 빈부의 차별 등 모든 차별이 없어지도록 주님의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루는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자체가 화목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세상에 평화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교회는 봉사의 사역을 수행한다. 교회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섬기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모든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일을 계승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봉사의 뿌리는 사랑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은 섬김의 직책을 받아서 서로 서로가 봉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이다. 2. 교회가 밖을 향하여 하는 일 첫째로, 교회는 세계 구원을 위한 복음을 전파한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차원에서 교회는 자체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이 세상 모든 분야가 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전하고 회복되도록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사랑의 봉사를 수행한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면 쇠퇴하나, 세상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면 흥왕 하여 진다. 7. 교회의 일과 일꾼들 1. 일하기 위해서 세워진 교회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일]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계속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홀로 그 일을 완전히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진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기관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교회가 계승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일을 수행할 일꾼들을 세움 교직 제도의 시작 : 교회가 주님의 일을 맡아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담당할 일꾼이 필요하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부흥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져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일곱 집사들을 세워 그 많은 일들을 분담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조직의 시작이요, 교직(敎職)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직무를 누구에게 물려주었는가? 어떤 특정인들에게 물려주었다기 보다는 모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3. 교회의 공동 직무와 특별한 직무의 분화(分化)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일들 중에 그리스도인 하나 하나가 반드시 똑같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복음 전하는 일이나 말씀을 가르치는 일, 중보의 기도 생활, 화해자의 역할, 형제의 발을 씻기는 봉사의 일, 구제하는 일 등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모두가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사역이요 필수적인 사역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라나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례식을 거행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 그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그 직무의 목적대로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 맞는 직무 담당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여러 가지 직임을 세우게 되었다. 교회의 평신도 모두가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공동 직무가 기본이요 중요한 것이지만, 교회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특수한 경우에 세우는 특별 직무가 구분되는데 이것은 결코 특권도 아니고 신분의 차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 근본 정신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섬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이나 주교나 신부와 같은 신분과 평신도들의 신분을 구별하는 교직 제도는 초대 교회의 정신과는 판이한 것이다. 4. 여러 가지 직무들 초기 교회의 여러 가지 직무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도와 선지자(예언자) 전도자, 목사, 교사, 장로, 감독, 집사 등이다. 이러한 모든 직무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경우와, 교인들이 선출한 경우로 나눌 수 있고, 칼빈의 분류대로 [가르치는 직무]와 [봉사하는 직무]로 나눌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직무는 하나님의 은사를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튼튼히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이요, 봉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엡 4:12). 모든 직무는 성령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주장하심으로 성령께 복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전12:4-6, 행1:8). 8. 바람직한 교회 갱신 1. 교회 갱신의 당위성 교회론에 들어오면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여기서도 교회 갱신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고 그 형태를 끊임없이 갱신해야만 살게 된다. 교회는 완성품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사도들도 교회를 완성품으로 만든 일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계승자인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역사 속에서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 재림때 완성되어 하나님 나라로 대치될 것이다. 교회의 형태나 내용에 있어서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다만 변해서는 안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뿐이다. 교회는 바로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도구일 뿐이다. 구약 시대에도 교직 제도나 제사 제도 같은 것이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2천년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는 항상 자기 갱신에 힘써 왔고 그것이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이나 조직의 개혁뿐만 아니라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까지도 시대에 맞게 항상 변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진리이지만 그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도 상황의 변화에 맞게 발전해 왔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복음을 낡은 부대에 오래 담아 두면 안된다. 복음은 언제나 새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교회 갱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2. 바람직한 교회 갱신 교회는 어떻게 개혁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까? 1) 전체적인 개혁보다는 필요에 따른 지역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 1세의 전체적인 제도 개혁이나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같은 획기적인 대개혁을 앞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 그러한 혁명적인 대개혁을 필요로 할 정도로 정체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2)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이 좋다. 살아 있는 몸은 부단히 신진대사를 하는 것처럼 꾸준하게 자기 갱신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병이 심해져서 갑작스러운 대수술을 하는 것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서 병을 키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외형적인(제도와 조직들) 개혁과 내부적인(신학과 교리) 개혁은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음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절실할 필요가 안에서 일어나 밖으로 확산되면서 자연스러운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4) 교회 외적인 힘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개혁되는 것보다는 교회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순수하게 개혁해 나가야 바람직하다. 3. 바람직한 교회상 모색 1) 보편적이면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서 세계 교회가 연합하여 공동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2) 복음 적인 교회는 부흥하고, 문화적인 사업이나 사회 개혁에 역점을 두는 교회는 쇠퇴한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역점을 두고 성서적인 순수한 신앙 운동을 일으키는 교회가 바람직한 성장을 한다. 3) 교회의 제도와 조직을 능률화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교직 담당자나 평신도가 공동 직무를 인식하고,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활동을 극대화시켜야 교회라는 전체 덩어리가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4) 세상을 지향하는 섬기는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5) 교회는 현실주의에 빠지지 말고 종말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현실을 가장 책임 있게 살아가는 교회상을 정립해야 한다. 6) 바람직한 교회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선포하며, 뜨거운 사랑으로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여 역사와 세상의 정의로운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 1. 전도의 동기 - 무엇 때문에 전도해야

    1) 원인을 모르고 멸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8:44절에 -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 요3:1-6절과 관계된다. 불신자들이 지금 멸망받고 있는데, 원인을 모르고 멸망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된다. 남이 우리를 보고 혹시 욕을 할지라도 전해야 된다. 누군가가 이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서 이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다. 지금 불신자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 여기서 예수님이 뭐라고 진단하셨느냐? 하면,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하였다. 이것을 잘 보게되면 그 다음 답이 또 나온다. 2) 이러다가 내세는 물론이고 현세에서 저주를 받는다. 이 사람들을 건져내지 아니하면 절대로 안된다. 엡2: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러니 미신을 지킬 수 밖에 없다. 불신자들을 보고 무조건 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지금 길이 없다. 길이 없으니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동기가 될때에 우리와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이 부분을 우리에게 바로 알리시고, 건지시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 어쩔수 없이 우상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전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답답하니까, 다른 방도가 없어서 굿을하게 되고, 귀신을 섬기게 된다. 이래서 자꾸만 더욱 고난 가운데 빠져들어가게 된다. 3) 정신적인 문제가 자꾸 온다. 이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자연적으로 지금 사람들은 물질이 없어서가 영적인 문제가 온다. 그래서, 노이로제나 정신병자들이 굉장히 많다.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사단의 장난이다. 원인이 해결 안되기 때문에 엡2:3절에 보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다. 이래서 불신자들은 거기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들을 건져낼려고 마음 먹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기쁘신 일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전도하는 동기인 것이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잘 보고 나가면 금방 역사를 일으킨다. 한 집에 이 역사가 일어나면 집안 전체를 건져 내어버린다. 또 이 소문이 자꾸 나게 되는 것이다. 4)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육체적으로 굉장히 잘되는 것같이 보이다가도 갑자기 실패해 버린다(행8:4-8) 각종 이상한 병으로 고생하게 되는데, 영적인 원인으로 오는 병들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불신자들이 육체에 병들린 것은 육신적으로 오는 것도 있고, 영적으로 오는 것도 있다. 영적으로 오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금방 나아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능력이 아니다. 얼마든지 주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큰 문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가 치료에 대한 원리를 잘 이해해야 된다. 영적으로 온 병일 경우에는 아무리 불가능한 병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치료된다. 또한, 그 사람이 완전히 안낫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주님이 원하시는 부분은 낫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증거가 오게 되어있다. 이래서 복음의 문을 계속 열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5)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실컷 고생한다(눅16:19-31). 참안식이 없다. 물질도 많고, 지위도 높고 다 갖추었고, 다 되어진다. 그러나, 하나만 안되어진다. 제일 중요한 것이 안되어진다. 영혼의 안식이 없다. 그리고 분명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 그러다가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 사람들을 건지는 것이 우리의 동기이다. 여기에 촛점을 잘 맞추면 전도의 문들은 계속적으로 열린다. 안열릴리가 없다. 이러한 자들을 건질려고 우리가 마음을 먹고 있으면, 사람을 누가 만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가 방법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도의 기초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사람을 건질 수 있는 멧시지와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누가 사람을 보내느냐?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어져야 전도가 바로 이해되어진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전도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이 되어, 너무너무 고생이될 뿐이다. 전도하다가 고생만 실컷하고 그런다. 전도하고 도리어 있는 믿음이 떨어지고 그런다. 힘이 싹 다 빠져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멧세지만 가지고 있으면 누가 영혼을 만나게 해주시느냐?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것이다.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지는 법이 없는데, 한 영혼이 구원 받는데, 우리 수단으로 구원받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도 큰 오산이다. 하나님이 들풀도 먹이시는데, 구원받아야 될 사람을 찾아 내어서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 알도록 만들고, 하늘나라 가게 만드는 이 중대한 사역을 아무렇게나, 우리가 수단 부리고 하는데, 하나나님께서 되게 해주시고, 수단 안부리니까 안되게 해 주시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는 주의 일이 되어지지를 않는다. 이런 사람이 다락방 나가 보아도 안되는 것이다. 6) 후손들이 자꾸 망한다(출20:4-5)(고전10:20). 나라가 자꾸 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5천년 동안 게속 망해왔다. 출20:4-5절에 분명히 우상숭배하는 나라와 민족은 그 후손이 3-4대까지 망한다고 되어있다. 고전10:20절에는 제사 지내는 것으로 얼마나 백성들이 죽어가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의 신사참배는 거절하면서, 무엇 때문에 제사지내는 것은 쉽게 합니까? 이게 지금 똑같은 원리이다. 신사에게 절하는 것은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고, 제사하는 것고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다. 고전10:20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귀신과 교제하는 것’(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손들이 이래서 망하는 것이다. 귀신을 섬겨서 잘 살리가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육간에 멸망받는다. 이것을 우리가 빨리 건져내고, 복음 전하면서 확실한 말을 해주면, 제사 문제 해결받고 예수 믿을 사람이 많다. 지금 불신자들 가운데, 제사 지내는 이유가 겁이나서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지내고 싶어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안지내니까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에 지내는 자들이 많다. 불신자가 제사 안지내면 어려움을 당한다. 왜냐면,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이다. 이 마귀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마귀를 기쁘게 해주지 않고는 마귀에게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건져내어 주어야 된다. 베뢰아라는 단체에서 불신자들이 죽어서 귀신된다는 말은 천만의 말씀이다. 불신자가 죽기 전에 귀신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정말로 불신자가 죽어서 귀신 되는것 같으면, 그 귀신이 자식을 도우지, 실패를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는가? 그러니, 성경을 너무너무 꺼꾸로 깨달은 것이다. 마귀에게 속았다. 그 베뢰아가 완전히 귀신에게 속은 것이다. 불신자가 속아서 귀신되는 것이 아니다. 무당도 그렇게 알고 있다. 무당이 귀신들린 자이니, 귀신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이다. 성도는 살아 있을 때, 성령이 함께하신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는 살아있을 때, 귀신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가 죽으면, 귀신이 불신자의 흉내를 얼마든지 낼 수 있다. 귀신이 무슨 짖인들 못하겠는가? 그러니까, 그 귀신이 그 후손들을 완전히 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불신자들이 안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우리가 건져 내어야 되는 것이다. 건져낼 수 있는 길은 교회밖에 없다. 이것을 건져낼 수 있는 길은 주의 종들과 사명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어있다. 예) 구미에 어떤 장로님이 하는 말씀이 ‘나는 아들을 목사는 안만들겠다!’고 한다. 대단히 이해를 잘못하고 있었다. 목사를 무슨 사람이 만들고, 신학교에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이 목사를 만드는 것이다. 뭐하라고 목사를 만드시는가? 불신자들을 살려내는 중대한 일을 하라고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장로님들이 복음에 대한 기초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기초도 몰라요! 우리가 헌금을 해서, 목사 전도사 월급 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교회에 대한 ‘교’자도 모르는 것이다. 새로 공부해야 할 판이다. 주의 종들이 영적인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도록,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헌금을 해서, 육신적인 부분에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장로님들이 너무 꺼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망하지요! 일이 될리가 있는가? 하나님을 그렇게 모욕적으로 알고 있는데, 주의 일과 전도를 그렇게 이상하게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복을 받겠는가? 너무 머리를 이상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오늘 철저히 회개해야 된다. 그것은 마귀가 굉장히 기뻐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목사님의 사례 기준이 어디냐? 그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기준이다. 식구가 많으면 많이 주고, 작으면 작게주고 그러는 것이다. 그 육신이 영의 일을 지장없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기준이다. 전도사님이 목사님보다 식구가 많다면, 전도사님이 월급을 많이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준이다. 이 기준을 모르니까, 교회가 흔들리는 것이다. 교회가 연말이 교회 예산 세우는데, 벌써 흔들린다.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 불신 영혼을 살리는 일은, 청화대에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 박정희 대통령이 18년동안 통치하다가 비명에 갔는데, 그 사람이 청화대에다 부처를 놓았는데, 아직도 못들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김영삼 장로가 그것을 들어낼려고 하니, 너무도 반발이 많아서, 지금 어떻게 들어낼까? 연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그 정도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그림자같이 따라 다니던, 차지철씨가 소망교회 안수집사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음을 모르니, 일이 안되어지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집사로 세워 놓으니, 대통령에게 가장 좋은 말을 해 주어야 되는데, ‘우상숭배하면 망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모르니까,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예)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되자마자 일으킨 운동이 국풍운동이다. 그게 무당운동이다. 무당 50만명을 데리고 대회할려고 그러지 않았던가? 결국이 그 대회가 무산되었습니만, 그 분이 마지막때, 또 전국에 단군신전 세울려고 하였지 않았습니까?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다. 알면 그러겠는가?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옛날에 하나회의 별자리들이었다. 그리고, 국무위원들이 거의 다 장로님들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런데, 말을 제대로 안해준 것이다. 예) 노태우 대통령이 대통령 되자마자 이룬 일도 많지만, 세계 최대의 불상을 지금 팔공산에 만들었다. 모르니까요. 느부갓네살 임금이 느부신상 만들어 놓고 죽었다. 나라가 망했다. 무엇 때문에 망하는가? 자꾸 경제에만 촛점을 맞추고, 정치에만 촛점을 맞추니 일이 될리가 없다. 그러니 중대한 말을 해 주어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 따라다닌 사람들이 거의 다 신자이다. 그러니, 이 일을 청화대에서 할 수 없고, 국회에서 할 수 없다. 너무너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2. 전도의 방법 다른 아무 방법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였고, 행 4:12절에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역에 가서 무슨 운동을 해야 되느냐? 하면, 생명운동과 예수능력 운동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두개만이 사람을 살린다. 이 두개만이 교회를 힘있게 하는 것이다. 그외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죄를 짖는 것이다. 행정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생명, 예수능력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안수집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려면, 행정을 먼저 배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배워야 된다. 신학생이 신학공부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배워야 된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 이전에 중요한 것이 생명이다.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 왜냐하면, 창1:27절에 보면, 원래 인간은 이러하였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과 사귀도록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개입되었다. 죄와 사단이라는 존재가 들어와서는 인간을 완전히 하나님을 모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저주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 6가지 저주가 없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이 6가지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된다. ‘강단에서 복음만 말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데, 복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되니까, 인간에게 문제가 안풀리고 저주가 떠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이 복음을 강조해야 되느냐? 예수를 10년, 20년 30년 믿고 멸망받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이다. 왜냐면 이 부분에 대해서 희미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아야 된다. 지금 중직자들에게 무슨 답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이 복음 말고는 이 땅을 건질 것이 없다!’는 답이 나와야 되는 것이다. 이 복음 말고는 내가 살길이 없다는 답이 안나왔다는 것은 답이 아직 안나왔다는 뜻이다. 이 복음만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는 것을 꺼꾸로 하면, ‘내가 복음 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 광주에서 예수 잘믿는 집이 망해도 너무 표나게 망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너무 많이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 한번 기도해 달라!’고 한다. 한번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이 사람이 왜 망하는가? 물어볼것도 없이 이미 답이 나온 사람이다. 무엇을 모르느냐? 이 복음에 관한 부분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잘 모르니 얻어 터지는 것이다. 이래서 얻어터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 믿으면, 영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 땅을 정복하고, 축복을 받게 되어있다. 이것은 기복신앙이 아니다. 기복신앙이란? 무조건 복을 달라는 것이 기복신앙이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바로서면 복받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건강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은 기복신앙이다. 아무데나 가서 안수받아서 병나을려고 하는 그것이 기복신앙이다. 무조건 건강하게 살겠다는 그것이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돈벌어야될 이유가 있고, 건강해야 될 이유가 있고, 교회 성장시켜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본문제가 해결 안되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셨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 병 치유를 위하여 기도할때, 기도하러 가시는 분이 무엇을 명심해야 되느냐?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이 이 사실에 대한 확실한 진리가 그 사람 마음에 들어가야 그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나도 그 사람은 산 것이 아니다. 언제 망해도 망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해주고 망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여러분이 기도해준 그것이 악한 조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뭐하고 말하느냐? 하면, ‘내가 이전에 믿음 좋은 사람하고 기도해서 낫기도 했는데, 결국은 소용이 없더라!’고 그런다. ‘내가 안수기도 받고 낫기도하고 그랬는데, 또 안되더라, 그러니 이게 별수 없는 짓이다! 그러니 예수믿을 필요없다!’고 말하고 소문내는 것이다. 이러니, 여러분이 기도해준 그것이 그 사람을 더 지옥으로 밀어넣는데, 굉장한 역활을 해 준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 가슴속에 이 롬5:8절의 구속의 진리가 들어가버려야 낫든 안낫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지금 아픈 사람에게는 복음을 받을 기회인 것이다. 왜냐면, 약하니까 마음의 문이 다 열린 것이다. 이때 병고치는 것만이 치유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목적은 그렇지 않다. 오직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부터 집어 넣어야 되는 것이다. 특히 ‘모든 문제’란? 죄와 사단의 문제를 해결해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죄와 사단은 언제든지 붙어 다닌다. 분리가 되지 않는다(요8:44,요일3:8). 1) 복음이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복음이라고 말할때, ‘아주 기초적으로 처음 신앙에 대해서 배울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그같이 수준 낮은 복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를 오래 믿음면, 무슨 복음 이야기를 하지말고,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시말해, 지성주의가 들어가서는 거기에 속는다. 이래서 교회 중직자들이 오해해서, 박사학위받은 목사님을 좋아하게 되고, 목사도 그 장단에 춤춘다. 그러나, 강단에서는 언제든지 이 복음을 선포해야 된다. 성경 66권이 전부 이 복음 선포하도록 다각적으로 계시를 주신 것이다. 이것만 되면 계속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삶은 어떻게 사는 가? 능력에서 나오고,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생명을 얻어야 되는 것이다. 아주 확실하게 말해야 되는 것이다. (롬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5:24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내 말을 듣고 믿는자는 된다!‘고 하였다. 어떻게 믿는 자입니까?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2) 영접이란? 또, ‘영접한다’는 말을 잘 모르고 있는데, 전도할려면 영접이란 말을 잘 알아야 한다. ‘목사님 저 사람 영접했는데, 구원의 확신을 못가져요!’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대로 영접이 안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영접이란? 복음의 진리를 몽땅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받아들였다면, 영접해도 아닐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진리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한다. 그 이름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교회 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잠27;1절에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지금 결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아서 결혼해야 한다. 구원받기 전 상태에서 결혼한 것과 구원받은 상태에서 결혼 한 것과는 천지차이다. 구원받기 전에 취직한 것과 구원받아서 취직한 것과는 천지차이다. 벌써 인도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다. 구원받기 전에는 사단의 운명에 묶여있다. 이래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신랑이 어지간이 좋아서, ‘시집가서 구원시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어지간히 믿음도 좋고 전도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너무 진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 불신 남자와 결혼하거나, 불신 여자와 결혼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는 아예 운명이 다른 것이다. 다른 운명끼리 만났으니 고생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신자는 아닌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 가운데, 불신자가 신자의 차이점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얼마나 중요한가? 3) 구원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느냐? 이게 또한 중요하다. 이런 것을 언제든지 우리 머리속에 넣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우리는 영접하면 끝나는 줄로 안다. 그러나, 영접하고 난 후에는 더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구원받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구원받은 이후에 오는 비밀이 더 많은 것이다. 구원받은 이전에 주님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만드셨다면, 구원받은 이후에는 더 큰 사건을 만드셨다. 그러니까, 윤리든 행정이든 모둔 것이 구원 속에서 다 나온다. 교회 안의 모든 제도도 구원 속에서 다 나온다. 구원 속에서 안나오는 윤리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게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생명 속에서 안나온 제도는 일반 제도와 같다. 그로므로 이 구원과 생명에 관한 문제가 잘 안되어지면 모든 면에서 제대로 안되어 지는 것이다. 당회가 제대로 안되어지는 것이다. 이게 안되어지면 제직회가 안되어진다. 왜 안되어지는가? 생명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다 나오기 때문이다. 법관은 법다루듯이 나오고, 학자는 학문하듯이 나오고, 도장파는 사람은 도장파는 식으로 나오고, 학교선생은 아이들 가르치는 식으로 나오고, 하였튼 여러 식으로 나온다. 이러니, 이걸 묶어 놓으니 시끄러워요. 그러니 어지간한 목사님들은 당회원들을 끌고 나가기가 너무 힘이 드는 겁니다. 이 사람 맞추어야지, 저 눈치 보아야지, 그러는 것이다. 이 눈치를 안보아주면 굉장히 기분 나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확실해져야 같이 뛰는 것이다. 이 부분이 확실해지지 않으면 같이 못뛰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교인이지,주님과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은 아니다. 이것이 되어져야만 바른 일군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이런 일꾼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지금 바깥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 ① 해방을 받았다(롬8;2). 증거가 온다. (롬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② 구원받아버리면 그때부터 성령이 동행한다(요14:16-26). 자신이 몰라도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실히 믿자!’ 이렇게 되어지면 능력받는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인도를 깊이 받는 사람을 가리켜 신앙이라고 한다. 이 사실에 너무너무 확실한 인도를 받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것이다. 그러면, 별로 의논하지 않아도 통한다. 성령 안에서 통하는 것이다. ③ 이때부터 열쇠가 주어진다(마16:13-20) - 기도할 수 있는 열쇠이다. 어마어마한 것을 주신 것이다. ④ 이때부터 권세가 주어진다(마12:28-29)(막3:13-15). 우리에게만 주신 권세이다. 전도 못하도록 하거든 막3:13-15절을 말해주라! ( 막3:13-15)“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a.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b.전도도 하며 c.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말은 무슨 귀신론 만들어서 하라는 말이 아니고, 귀신이 전혀 없다고 싸우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쁘신데, 헛소리 하셔서 나온 말씀이 귀신입니까?예수님이 말씀하실때마다 이 귀신 이야기들이 종종 나온다는 사실에 귀를 귀울여야 된다. 이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턱도 없는 단체들이 일어나서는 ‘귀신론’을 만들어서 교계를 혼란시키고 있다. 왜냐? 우리가 말을 안하니까. 그러니, 정확한 답을 평신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셨고, 성경에 많이 있고, 현실적으로 있기 때문에 가르쳐야 된다. 무슨 말인가? 불신자들이 지금 귀신에게 잡혀 죽어가고 있다. 이것을 건져내는 유일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 가지고 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믿으라!고 주신 것이다. 성경은 논쟁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믿으라고 주신 것이다. 논쟁도 어느정도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할 것이지, 진리에서 떠나갔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래서 우리는 양심적으로 고백할 것이, 교인들 가운데 귀신들려 헤메는 사람들이 많다. 이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안가르쳐 주니까, 아무데나 가서 은혜받으려고 한다. 아무리 강단에서 큰소리쳐도 안듣는다. 왜? 자기가 이 귀신에게 걸려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데나 가므로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안가르쳐 주면, 큰일난다. 이상하게 할 것도 없다. 성경대로, 지금 불신자가 여기에 빠져 죽어간다. 그러나, 엄청난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마12:28-29절에, 사단을 결박할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이땅에 있는 동안에 기도해야 할 것이고, 이 권세를 사용해야 한다. 왜냐면, 주님 재림오실 때까지 이 사단은 활동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가면 기도 안해도 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기 싫은 사람은 하늘나라 가면 된다. 이땅에서는 꼭 기도해야 된다. 늘 기도해야 된다. 왜냐? 이 사단과 귀신 존재가 늘 여러분을 넘어뜨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권세가 깨어진 것이지, 사역이 깨어진 것이 아니다. 사역은 언제 끝나는가? 마25:41절에, 주님 재림오시는 그날에 끝나는 것이다. ⑤ 하늘에 어마어마한 영적인 비밀을 예비하셨는데 천사를 통하여 주신다. 우리가 말씀대로 움직이고 주의 뜻을 이루기만 하면, 시103:20-22절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을 보내서 하늘의 비밀을 이루신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을 다윗이 고백한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잘 안 것이다. ⑥ 영원히 망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시민권을 주셨다(빌3:20). 이 말은 저와 여러분이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 나라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보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⑦ 이 사실을 나가서 증거해야 한다. 어디가서? 세계에 가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축복중에 축복이다. 단순히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위의 6가지 사실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도이다.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모른다. 4) 어찌하여서 예수 영접하면 이런 축복이 오는가? ① 요14:16-17절 -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내주한다고 하였 다. 이것은 신약에만 쓴 말씀이다. 구약에는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다. 구약 시대는 성령이 임했다고만 하였다. 신약시대는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며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증거가 오는 것이다. ② 요14:26 - 우리가 이때부터 기도하면 하나니이 세밀히 인도하신다고 하였다 성령께서 그렇게 말했다. ③ 고전3:16절 -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놀라운 일이다.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전화 한통하고, 편지 한장 보내고, 선물하나 보내서 전도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불신자가 교회 올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말씀해서 묶여 있는데서 풀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될때에 역사가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다. 꼭 명심해야 될 것은 저와 여러분은 전쟁해야 될 사람으로 알면 된다. 그러므로 무장해야 된다. 우리는 지금 무장해야 된다. 전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다. 전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엡6:10-20절에서 우리에게 ‘무장하라!’고 하였다. 무장할 이유도 밝혔다(엡6:12-13). 그리고 어떻게 무장해야 되는가? ①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구원의 확신), ②가슴에는 의의 흉배를 붙이라!(그리스도의 의와 구원의 감격),③ 허리에는 진리의 띠를 매라!(약속 의지하여서 나가야 한다), ④왼손에는 방패를 가져한다. 그 방패 이름은 믿음이다. 사단의 화전을 막는 방패이다. ⑤오른 손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이땅에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⑥군인은 본부와 연락이 잘되어야 한다. 본부와 연락이 언제든지 잘되어야 한다. 연락이 끊기면 큰일 난다. 그리고 군인은 경계근무를 잘해야 된다. 이것이 기도이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하였다. ⑦군인이 완전무장하였는데도, 군복입고 칼들고 다 들었으도, 신발이 없으면 못나간다. 무슨 신발인가? 복음의 평안의 신발을 신어야 하는 것이다. 4) 이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되겠는가? (마28:19-20) ① “너희는” - 요원화 빨리 이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야 한다. 빨리 성도들로 하여금 5가지를 체험시켜야 한다. 1단계할까요? 2단계할까요? 그런 것이 없다. 체험시켜야 한다. 성경공부 대강 해서는 모자씌워서 사진찍고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게 아무 힘도 없는데 어떡합니까? 복음을 전해야되고, 역사가 일어나야지... 안그래요? 이 사실을 빨리 가르쳐야 한다. 교회 안에서, 현장에 가서, 기존신자에게 가르쳐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게 우리의 중대한 사명이다. 기존신자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그 지역 복음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빨리 회복해야 된다. 안그러면 열심있는 순복음에게 다 빼앗겨 버린다. 알고보면 그렇게 생명있는 것을 찾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건강달라, 물질달라!...’하면서, 하였튼 부르짖는데, 전국에서 열심있는 자는 여기에 다 모였다‘ 싶을 정도이다. 반질반질한 사람은 여기에 다 왔다! 싶을 정도이다. 이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와서는 완전히 기도한다. 집에 가지도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1부, 2부 이런 것도 없다. 어떻게 보면, 50만명이 아닌지도 모른다. 왜냐면 1부 드리고 안가고 계속 앉아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안가니까, 말씀듣고 앉아서는 하루종일 기도하는 것이다. 놀랠 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이지, 저 사람들은 바로 된 것이라고 본다.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루종일 기도하는 그것이 잘된 것이아니겠는가? 서울의 전 교회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 하나를 못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기존신자를 빨리 일으켜 세워야 된다. 그리고, 지금 전도 같은 것은 선교단체 등에 다 빼앗겨 버렸다. 선교단체에 주의해야 될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영적으로 무교회 사상이 있다. Discusion(토의)하는 것이 주로 무교회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어디서 출발되었느냐? 하면, 목사 설교 들을것이 없고, 우리끼리 성경 펴놓고 의논하다. 그래서 서로 은혜받고, 아멘! 하자는 것이 디스카숀이다. Sharing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필요하지만, 교회가 무턱대고 교회에 도입하였으니, 교회는 성장되지 않는다. 이것이 출발이 어디서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괜챦다면서 따라가다가 어려움 당하는 것이다.

  • 종려주일의 교훈 (마21:1-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할렐루야!! 부활의 달 4월 첫 주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온 누리에 화사한 생명력이 넘치는 4월 가정마다 강건하고 행복하고 부활의 믿음으로 충만한 한달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서론 오늘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종려주일입니다. 이날의 유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주님을 추종하는 성도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처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들고 나와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영접한데서 비롯된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날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은 성경에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시며 영적인 의미에서는 사탄의 도전에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만 왕의 왕 되신 주님께서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해 악의 세력을 향해 승리의 진군을 하신 날입니다. 2.종려주일의 교훈 : 종려주일의 교훈 중에 교훈은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것은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 사명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그 피로 만대만민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사명입니다. 막10:45절을 보면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에 초림 하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오직 주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그의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온갖 고난 고초를 당하셔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담담하게 어린 나귀를 타시고 사명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사명이란 너와 나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적든 크든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나만이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으시기에 가능교회에 보내주시고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심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정치가 이토록 혼란한 것은 저들이 왜 정치인으로 부름을 받았는지를 바로 알지 못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정치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워진 자입니다. 나를 희생하고 헌신하여 어찌하든지 나라가 잘살고 번영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들의 사명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이 맘놓고 평안히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내는 것이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대부분들은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정치하는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당리당략에 매달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오히려 백성들의 안위를 볼모로 잡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나라의 안위까지도 자신의 정치세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사고입니까? 이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에는 나라를 외국에 빼앗기고 민족 말살의 위기를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는 정치인들이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정치인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나는 어떤 사명이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으로서 무슨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내가 이 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까? 왜 내가 목회자가 되었습니까? 왜 내가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되었습니R? 왜 내가 제직이 되었습니까? 왜 내가 성도가 되었습니까? 왜 내가 찬양대원이 되었습니까? 왜 내가 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젊은이들 가운데 나를 부르사 내 젊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른 해답을 오늘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입니다. 복음을 위해 주어진 사명입니다. 몸된 교회를 위한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께서는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을 포기 하십니다. 고난을 감수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십니다. 자신의 명예도 이익도 포기하십니다. 자신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사명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충성스런 사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 충신입니까? 저는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유익이 없어도 나라 위해 민족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기에 충신입니다. 바울이 왜 충성된 종입니까? 저는 복음 위해 주님 위해 하나님의 나라 위해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죽을 매를 맞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부귀 영화를 분토로 여기는 자였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나의 목적이 살아있는 자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충성스런 사명완수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3.사명에 살면 축복이 있다.: 성경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상급이 있음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마25:21-23) 충성된 종에게 많은 상급과 더 좋은 자리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마20:1-16) 충성되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부족해도 많은 삯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계2:10)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는 생염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명에 살고 사명을 완수하는 자의 공통점은 자기를 버리고 맡기신 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죽을 때까지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충성하여 일생의 건강의 복을 누렸습니다. 베드로가 충성하여 그 이름이 세계사에 남았습니다.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사명 감당에는 마귀의 도전이 있다.: 사명을 감당하면 이생과 내세에 상급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귀의 도전과 위헙과 공갈과 협박이 있습니다. 충성된 종들의 삶의 이면을 보면 이런 도전을 받고 굳건하게 서서 이기고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각오로 사명을 위해 나아갈 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겟세마네동산의 시련이 있음을 봅니다. 그 사명이 중대하기에 사탄은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려하여 유혹합니다. 미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십니다. 우리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 우리도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생의 안목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쾌락의 유혹을 넘어설 수 없니다. 유다를 보세요. 주님 섬기고 복음 위해 죽어야 할 가룟 유다는 왜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지를 바로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따르며 자신의 부귀 공명에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과 자기 자신의 무사 안일을 위해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스승 되신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배신자가 되었고 목메어 죽었으며 영원히 오명을 남기는 불쌍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을 보세요 저들은 한결같이 목숨바쳐 사명을 완수하므로 위대한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5사명을 감당하여 축복을 누립시다.: 딤전1:12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일을 맡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능의 성도들이여!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 맡은 자리에서 생명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기쁘게 감사하며 사명을 감당함으로 교회가 은혜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확장되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종려주일부터 부활절까지

    3월 16일(종려주일 ) - 예루살렘 입성 (마21:1∼11, 막11:1∼11, 눅19:28∼40, 요12:12∼19)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막11:11). 갈릴리와 베뢰아 지경에서의 전도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행사에 참석키 위해, 그리고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자신도 예언한 바대로의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 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한 각오를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공공연히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셨으며, 눈에 보이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 란 뜻)를 외치며 환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 보셨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신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의 죄악이 가득차 있음을 보셨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셔야 했다. 묵상 1. 수난과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믿음, 용기를 생각해 봅시다. 2. 오늘 우리 마음과 교회를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보신다면 무엇을 느끼실까? 우리 자신과 교회를 살피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집시다. 3월 17(월요일) -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17, 막11:12∼19, 눅19:45∼48, 요2:13∼22)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의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막11:15).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고자 하였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자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는 무화과로 상징되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행위였다. 당시 성전 안에서는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짐승, 나무,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고, 지역화폐를 성전화폐로 교환하여 주는 환전 행위도 성행하였다. 이같이 시장과 하등 다를 바 없게 된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게서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던 것이다. 유대교의 부패상과 형식주의를 정면으로 공박한 이 행위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대적들의 음모가 더욱 가속화 되어 갔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해 격분하시고 이를 깨끗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 자신과 주의 몸된 교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이 세상을 성결케 하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분노였다. 묵상 1. 나의 신앙이 저주받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아서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성전을 참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3. 우리도 예수님처럼 의롭지 못한 일을 보았을 때 거룩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3월18일(화요일) - 과부의 두 렙돈 (막12:41∼44, 눅21: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막12:43).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 넣는 것을 지켜보셨다. 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전국 각처로부터 많은 참배자들이 모였고 또 많이 헌금하는 자도 있었다. 이때 두 렙돈(렙돈은 가장 작은 히브리 화폐단위)을 넣는 과부를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그녀가 다른 많은 사람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칭찬했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많은 것 가운데서 일부를 헌금했고, 이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신앙의 핵심은 풍부한 양과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보여 주셨다. 즉 하나님은 헌신의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묵상 1.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헌신,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고후9:7, 고후8:12)? 3. 다음의 말씀을 묵상합시다. "많은 사람들은 지갑으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을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3월 19일(수) - 한 여인의 헌신 (마26:6∼13, 막14:3∼9, 요12:1∼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던 날이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오해와 걱정,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다. 나드 향유는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에게 바쳐지던 것으로써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이 액수는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간 벌어들이는 소득과 맞먹는다) 여인이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을 헌신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 그녀 자신도 자기 행위가 담고 있는 의미를 미처 알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준비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본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담하게 진실한 사랑을 바쳐야 하겠다. 묵상 1.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시간, 재능, 재물, 생명…)? 2.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 적은 없습니까? 3. 내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주님께 대한 봉사의 기회를 잃은 적은 없습니까? 3월 20일(세족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마26:17∼30, 막14:12∼21, 눅22:7∼23, 요13:21∼30)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4:22, 24).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고자 하셨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며, 오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도 그같이 행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 이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온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로 가르쳐 주셨다. 잡히시기 직전, 슬픔과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였으나 제자들은 잠만 자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마시고 깨어 있어 당신을 본받고 증언할 것을 원하고 계신다. 묵상 1. 오늘 내가 종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봅시다. 2. 나는 입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겠노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제자들처럼 잠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간구한 예수님의 최후 기도를 생각해 보고, 오늘날 내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주된 기도 내용이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 봅시다. 3월 21일(성 금요일) -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마27:1∼56, 막15:1∼41, 눅23:1∼49, 요19:1∼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막15:37).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었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가상칠언)을 명상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극진하신 사랑을 체험해 보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3∼34). 십자가에 못박고 침뱉고 창으로 찌른 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던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신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다"(요19:26∼27).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5∼46). 우리의 구속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이다.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이다. "다 이루었다"(요19:30).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셨다는 어린양의 승리의 외침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오신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결론짓는 말씀이다. 묵상 1. 용서함 받은 우리 역시 남을 용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임을 명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3월 22일(토요일) - 무덤 속의 예수 (마27:57∼66,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요셉이 …예수를 내려다가…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6). 유대 민중들로부터 종경받는 사람으로서 산헤드린의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오셉은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결연히 행한다. 즉 그는 자신을 예수님과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빌라도에게 청하여 자기를 위해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것이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계셨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그를 사랑하던 모든 사람은 절망에 빠졌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희망과 꿈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기 위해 무덤에 묻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도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다. 묵상 1. 나는 남들이 주님을 외면할 때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용기있게 주님을 찾고 따를 수 있습니까? 2. 무덤 속에 장사지내야 할 내 죄의 목록을 생각해 봅시다. 3. 우리는 고난과 죽음을 맛보아야 했던 주는 생각지 않고 부활과 영광의 주만 바라보지 않습니까? 3월 23일(부활주일) - 부활의 주를 만난 삶 (마28:1∼10, 막16:1∼8, 눅24:1∼12, 요20:1∼10)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눅24:34).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이다. 금요일에 장사지낸 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오늘, 과거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는, 그리하여 부활의 주를 만난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활한 주를 만난 삶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첫째로,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이다. 예수 처형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둘째로,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이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도들은 부활한 주를 만난 후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불식하고 새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셋째로, 참 생명을 발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을 향하여 무덤에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다. 시체가 있는 무덤을 향하여 올라갔으나 빈 무덤,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무덤을 발견했다. 넷째로, 가치관의 전환이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 중요도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주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부활한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묵상 1. 당신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늘 내 삶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묵상해 봅시다.

  • 예수님의 고난을 따르자

    (이사야 53:4,5 마가복음 8:34-38) 우리는 오늘 고난 주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난 주일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성전 뜰에 들어가 거기의 환전상과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틀째 되는 날 포도원의 악한 소작인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고난과 하나님의 심판을 다시 예고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삼일째에 예수님은 마리아로부터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으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향한 행진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그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구약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4, 5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나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음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옴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셨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결국은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깨어지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형제살해 사건, 6장의 홍수와 노아의 방주사건,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모두 인간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불쌍히 여기셔서 내리신 결단이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우주 만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첫째 아담으로부터 전해오는 죄악 때문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악의 값은 너무나 커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옴으로 우리는 아직도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는데, 문제는 우리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아직도 첫째 아담의 후예로서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새천년의 첫 번째 고난주간에 예수님은 여전히 고통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첫째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탐욕과 교만함으로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세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되어 아직도 불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 아니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알면서도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교만한 사람들 때문에 창조의 질서는 깨어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생명복제와 유전자 조작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하나님만의 생명창조의 영역을 사람들의 명예욕과 물욕이 침범하고 있습니다. 인간복제까지 꿈꾸고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듯 합니다. 둘째로는 인간과 인간 간에 서로 사랑하지 못하며 여전히 갈등과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경제는 발전하고 물질은 풍요로와졌지만 빈부의 격차는 점점 커져서 국내외적으로 그 갈등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지금도 수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식량이 없어서 죽어가는데 남한에서는 음식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이며, 사람들은 살을 어떻게 뺄 것인지 고민하는 형편입니다. 셋째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어 이 땅은 여전히 가시덤불을 내어 물, 공기, 흙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오염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물들어가는 물질문명은 겉으로는 편리한 세상이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가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3000만종에 달하는 생물종들이 인간이 만든 온갖 화학물질과 열대림의 파괴 등으로 일년에 수십만 종이 멸종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멸종까지 우려되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8:22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위에서 말한 세가지 죄악의 현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먼저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십자가를 걸고, 방에도 걸어 둡니다. 또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 십자가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궁극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여기에 살을 붙여서 고백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마음의 결단을 포함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기 때문에 나도 그와 같이 죽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머리나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오늘 본문 36절에 "온 천하를 얻고도"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온 천하"를 얻으려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통찰하시고서 경고하시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아닌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온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부질 없는 일이며 정말로 목숨을 구하려면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하시면서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한가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원인이 인간의 죄악인데 그 인간의 죄악은 또한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고난과 피조물의 고통은 그 원인이 모두 첫 아담의 죄악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피조물의 아픔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와 창조보전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통일과 환경보전의 선교적 책임을 부여 받은 새천년의 한국교회는 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절제와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피조물이 신음하며, 북한 동포들이 굶주리는 현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물질의 소비를 줄이며 형제와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오늘 말씀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셨으니 믿음으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올해의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은 공교롭게도 지구의 날과 겹쳐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동굴에 안치된 그 날이 바로 지구의 날입니다. 오늘날 지구는 동굴의 깜깜한 그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오염이 심각해서 절망적이라고 합니다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구를 살리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새하늘 새땅을 이룰 것입니다. 새천년의 첫해의 고난주간에 특별한 결단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 첫 번째는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밑에 있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절제와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는 길이며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셋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 영원한 생명을 찾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 그가 찔림은(종려주일)

    (사 53:4-6)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으며,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당해야할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사형 틀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방법입니다. 로마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그들의 십자가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징계라면,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이라는 대단한 사건이요 뉴스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사순절 주간을 보내면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십자가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저주를 받아야 할 인간 롬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병에도 유전병이 있습니다. 부모나 윗대에서 암이나 특별한 질병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으면 자식들에게 유전되거나 유전될 확률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질병이 유전되어 자식에게 전이되었을 때 사실 자식은 그 병에 대하여 불공평합니다. 건강한 부모를 만났으면 걸리지 않을 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서 갓 태어난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이 됩니까?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에게는 죄가 전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약속이 아담 한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인류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만들어 놓은 길을 인류가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식인종의 자식이 되면 당연히 식인종이 되고, 해적선 안에는 사랑과 의리가 있지만, 밖에서 해적선을 볼 때에는 해적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심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도 해적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해적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시편 14:3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한 삶을 추구하려는 순간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는 불행의 저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제사)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만 받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좀 나쁠 수 있습니다. 다음 제사 때에 아벨처럼 그런 자세로 제사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저주하거나 징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가인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잘못된 제사를 책망하기보다 가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다스릴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였고, 결국 그 죄로 동생을 죽이는 더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였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도 다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불행한 존재입니다. 이 죄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극복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2.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인류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려고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요 섬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죄는 원죄와 자범죄 입니다. 원죄는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죄가 인류에 전가된 것이라면, 자범죄는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므로 발생되는 행위의 죄입니다. 미움과 다툼과 살인 등등의 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시작됩니다. 죄는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합니다. 죄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영원한 사망에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야할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받아야 할 인간을 죄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기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우리의 죄악을 위해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로마 군병의 채찍에 쓰러지고 넘어지며 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여섯 시간을 고통당하며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방법으로 십자가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치욕입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형벌을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랑과 용서, 희생의 종교라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주님처럼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과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과 용서, 희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사랑과 용서, 희생이 있으면 아름다워집니다. 인간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던 하나님,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실천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했던 사랑과 용서, 희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86세의 나이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를 죽이려던 총독이 폴리캅에게 “예수를 모독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폴리캅은 “주님은 86년동안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모독하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가족을, 이웃을 한 민족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주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참된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오리 가자면 십리를 가라

    마5: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미국에서 변호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중에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를 만나 성공철학에 관한 것만 평생 연구하며 저술과 강연으로 정신 계몽가의 삶을 산 나폴레옹 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오 리보다 십 리를 걸어라'는 말은 성공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다."라고 말했다. "오 리보다 십 리를 걸어라"는 말을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주어진 의무보다 항상 더 많이 하면서 살아라." "주변의 기대보다 항상 더 많이 행동하라." "받는 대가보다 항상 더 많이 일하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 앞에서 세 가지 모습을 보입니다. 첫째, 사람들의 기대, 의무, 대가보다 못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둘째, 기대, 의무, 대가만큼만 하며 사는 사람들(오리를 가는 사람들) 셋째, 기대, 의무, 대가보다 더하며 사는 사람들(십리를 가는 사람들) 말씀을 통해 보면 역시 세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오리를 가자고 하면 무조건 거절하는 사람! 2) 오리를 가자고 하면 겨우 오리만 가는 사람! 3)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는 사람! 이런 태도는 일터뿐만 아니라 가정, 사람과 관계된 모든 삶의 현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사람들 중에는 출근시간보다 항상 늦게 오면서 퇴근은 제 시간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항상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확히 퇴근시간에 맞추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계약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출근하고 또 계약된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오 리보다 십 리를 가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5%의 사람들만이 받는 돈보다 더 많이 일하는 태도를 보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받는 돈 보다 더 적게 일하는 태도를 보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5%의 사람들 가운데서 성공한 사람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나머지 95%의 사람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리를 가는 사람이 됩시다! 만약 오리를 가자면... 1. 십리를 가되 억지로 가지 말라 다시 말하면 억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팔자'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운명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 포기하면서 그저 사는 것이 아무런 재미도 없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 이게 다 팔자려니...} {# 예수 믿으면 타고난 팔자도 고칠 수 있다} 흔히 부부싸움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억울해! 억울해! 내가 당신한테 시집와서~ 애 낳고 빨래해주고 밥하고 살다보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엉엉엉) 내가 당신 안 만났으면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살어! 알기나 알어! 내가 당신 만나서 팔자에도 없는 고생하는 줄이나 알어! 아느냐고? 내가 식모야? 당신은 내가 식모인줄 알지?" 그러면 남편도 질세라 "나는 뭐 안 억울한 줄 알어! 나도 당신 만나서 이 고생이지 나도 이 사람아! 당신 안 만났으면 벌써 출세했어! 알기나 혀! 그리고 내가 무슨 돈 벌어다 주는 머슴인 줄 알어 응? 아주 배가 불렀구먼! 배가 불렀어!" 한다} 여러분 우리가 똑같은 삶을 사는데 왜 이렇게 억지로 삽니까? 억지로 사니까 한 집에서 살면서도 한사람은 식모로 살고 한 사람은 머슴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집이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 결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일종의 형벌의식에서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혹 예배에 빠지면 하나님께 매맞을까봐! 벌받을까봐! 저주 받을까봐! 하는 생각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감기만 걸려도 내가 혹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구원받게 하시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하자! 2. 십리를 가다보면 보상도 있다 왜 오늘의 현대인들은 오 리 보다 십 리를 걷는 삶의 태도를 갖지 못할까요? 물론 타고난 성격, 그리고 훈련되지 못한 삶의 자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보상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있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이 보상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나태함을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맡겨진 의무보다 적게 일을 하기도 합니다. 만일 오 리보다 십 리를 갈 때 반드시 거기에 큰 보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망설임 없이 보다 쉽게 십 리를 가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보상이 있기 때문에 逑求?것이 아니라 일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라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 보상이 있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라 온다} 성경은 이렇게 단호히 행위에 대한 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7:7)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알 맞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앤드류 카네기는 회사의 직원을 승진시킬 때 자신이 세운 독특한 기준을 따랐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사람을 승진시키거나 보상을 해줄 때 지켰던 몇 가지 법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리보다 십리를 걷는 자를 승진시키고 많은 보상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법칙을 "플러스알파 법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플러스알파 법칙에 의하여 인생이 바뀌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찰스 슈와브"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카네기 회사의 노무자였습니다. 카네기는 항상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회사에 나갔는데, 갈 때마다 카네기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모든 직원이 퇴근한 후에도 일터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찰스 슈와브였습니다. 카네기는 그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너스를 줄 때 그에게 백만 불이라는 거액을 보너스로 주었습니다.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카네기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월급은 회사와 맺은 약속의 시간만큼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이며, 백만 불은 주어진 의무보다 더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오리보다 십리를 걸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찰스 슈와브는 카네기의 인정 아래 미국 최고의 철강회사인 '유나이트 스틸사'의 사장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추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학벌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고, 재능도 아닙니다. 평소에 그가 보였던 일하는 태도라는 겁니다. 그들로부터 강력한 추천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오 리보다 십 리를 걷는" 태도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훗날 어떤 보상을 가져오는지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에게 친구 이상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랑을 보여 주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20:17) 친구에게 친구 이상의 사랑과 정성을 베풀었던 요나단에게 돌아온 보상이 있었습니다. 훗날 다윗이 고통과 절망의 시절을 벗어나 왕이 되었을 때, 아버지 요나단을 잃고 고아가 된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왕자들처럼 살게 해 주었습니다.(삼하9:6,7)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그 열매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느 때든지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감격을 수반한 열매로 돌아옵니다. 3. 십리를 가다보면 자기 발전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있는 능력이 더 향상되고 자기 발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이 이미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다 사용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엄청난 일들을 이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능력의 5%만 사용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만한 삶을 살아간 천재들은 자신의 능력 중의 20%정도를 사용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천재는1%의 영감과 99%의 땀에 의하여 탄생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노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보여 주는 말입니다. 더 많은 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능력이 개발되는 결과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행동을 통하여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삼상17:32).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와 싸움을 하는 전쟁의 현장에 가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심부름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수행 중인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안부를 묻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앞에 전개되는 전쟁의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무심히 넘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싸움에 참여하기를 권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그 싸움에 자신을 던질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누가 요구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 이후로 그 어느 싸움에서도 실패하지 않는 용장임을 보게 됩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하여 다윗 안에 내재해 있던 용맹성이 개발되었던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강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사자를 그리려고 그리다보면 표범이나 고양이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양이를 그리다보면 쥐밖에는 그릴 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은 이미 자신에게 커다란 유익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능력이 계발되고 마음의 훈련이 되며, 더 나아가 삶의 위치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유익에만 집착하지 말고 자신도 모르게 내적으로 얻어지는 값진 유익을 바라보며 더 많은 일을 기쁨으로 해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십리를 가되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가라 {펩시콜라의 회장으로 있던 사람 가운데「존 스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플컴퓨터사가 그를 회장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깨끗이 거절했습니다. 펩시콜라 회장직에 나는 불만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넉넉한 봉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애플 컴퓨터 사로 옮겼습니다. 애플 컴퓨터 사의 오너 '스티브 잡스'의 한 마디 질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은 평생을 설탕물이나 팔아먹다가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멋있는 기여를 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까?" 이 한 마디의 질문이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질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목적은 무엇입니까? 일하는 목적은? 공부하는 목적은? 돈을 버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6.25 전쟁 후 울산에서 동태장사를 하며 사는 김씨 아주머니의 소원은 죽기 전에 성전을 하나 지어 봉헌하는 것이었다. 10년째 되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동전꾸러미를 주고 동태 한 상자를 사갔는데 그 동전 꾸러미에 값비싼 골동품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골동품은 당시로서는 아주 비싼 600만원에 팔렸습니다. 며칠 후 꿈에 갑자기 울산 앞바다의 자갈밭이 보였습니다. 다음날 부동산을 운영하는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울산 앞바다의 자갈밭 5,000평이 매물로 나왔는데 한 평에 300원씩 매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꿈에서 보았던 그 땅을 생각하며 곧바로 150만원에 땅을 매입했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뒤 그 땅은 29억원에 팔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울산의 현대 자동차회사의 땅입니다. 동태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는 교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꿈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은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꿈을 꾸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피영민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의 일, 선교의 일, 전도의 일, 구제의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누군가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려고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어 기대보다 더욱 큰 열매를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로 지금,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이십니까? <요 John 18:37-38, 19:4-5, 14-16>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마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묵 상> 죄인된 인간 빌라도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네가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때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정말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향한 삶을 살아가려고 진지한 자세로 물은 것이 아닙니다. 네가 동족에게 고소를 당해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의 상황에서 진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라는 물음입니다. 1)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진리, 생명의 진리, 소망의 진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 자신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만이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하,32)고 가르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과 거짓을 따라 사는 사람의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진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못하도록 하며 나아가 거짓을 진리인냥 따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온갖 사교와 거짓에 빠져서 파멸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은 진리되신 예수를 좇는 삶으로 사십시오. 구원과 참 자유와 평강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물질, 지위, 명예, 지식, 삶 전체가 예수께 속해 있을 때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2. 빌라도는 예수께 채찍형을 가하고 군병들은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 유대인들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마음대로 때려 피투성이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별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여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 혐의가 없음에도 애꿎게 고발당해와 나를 귀찮게 만든 사람 정도로 예수님을 취급했습니다. 자기가 놓아 줄 수도 있고 처형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께서 날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성육신 하신 분이심을 고백하시며 믿으십니까? 아니면 성현 중에 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그 분이 날 택하셨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잘 것 없는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세상이 어찌 여기든지 여러분은 이 사람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나의 구원의 주이심을 고백하시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는 나의 왕이 되십니까? 아니면 빌라도 처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너희 왕입니까? 내 마음대로 취급 할 수 있는 정도의 왕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면, 경외하며 받들고 그의 통치에 따라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대표하는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 '이 사람', '너희 왕'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된 우리에겐 이 세 가지가 하나요, 즉 진리가 예수요, 성육신 하신 이 사람이 예수요, 너희 왕이 예수이며 나의 구원의 주시요 나의 왕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소망 중에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들과 빌라도 <요 John 18:28-32, 37-38>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즐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묵 상> 1.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만 있었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만 있었지 선민의 사명은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었던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였고, 이들은 천사도 부활도 내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믿었으나 형식과 의식이 중요했고 근본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없는 종교인, 말씀 없는 신앙인, 형식적인 겉 껍데기 신앙인이었기에 자신들의 죄가 들어나고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지키기 위해 메시야를 처형했던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예수를 증오하며 죽이려는 악함이 가득한데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면 더럽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럽힘 받고 유월절 잔치를 먹기를 원하지 않아서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형식적인 태도를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말씀이 살아 여러분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납니까? 여러분 자신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자리를 내어드립니까? 2. 빌라도는 실리와 명분을 추구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세상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내도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치 말라는 조언도 받았습니다. 양심도 있어서 예수님의 무죄를 여러번이나 증거하며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칠 것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내가 쓸 것을 썼다고 주장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실리와 명분을 위해 잔머리를 굴립니다. 자신의 위치와 권한으로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 할 수 있었습니다. 관정과 밖을 여러 차례 오가며 일을 처리합니다. 유대인들의 동정을 바라기 위해 심한 채찍형을 가해서 초죽음이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놓아 주기를 바랬습니다.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석방하지 않고 바라바와 예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결국은 잔머리 굴리다가 정치적인 굴레를 씌워서, 즉 유대의 왕은 가이사인데 유대의 왕이라는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에 예수의 처형을 허락합니다. 기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예배 때에도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시고'라고 빌라도를 예수를 죽인 자로 선언합니다. 실리와 명분을 추구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의 처세술은 공의와 진리를 버립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버리고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경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 John19:17-22>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를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묵 상>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18:30)로 고소하면서 십자가 형으로 죽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에겐 적용할 수 없고 노예나 타민족의 행악자(반란을 일으킨 자)에게만 적용하는 형이었습니다. 당대의 Cicero는 십자가 형에 대해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죽일 수 있는 다른 형들도 있었는데 왜 십자가 형을 요구했을까요?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한 죄, 불순종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이심을 말씀으로 이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를 통해 자신들의 죄악이 들어나고 위선자임이 밝혀지니까 예수를 죽이되 행악자로 십자가에 극형으로 죽여야 자신들의 죄가 가리워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1. 십자가의 메세지는 내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나의 고집과 교만과 헛된 꿈과 분노와 시기와 야망 ... 등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인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한없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3. 십자가의 메시지는 어린양의 제사입니다. 제사는 죽음의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내가 죽은 것입니다. 또한 참된 예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제사로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내가 죽고 온전히 주님만이 높여지고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4.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에 대한 도전장입니다. 주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의와 영생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우리 속에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지녔을 때 세상은 복음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Pax Romana를 위해 닦은 도로는 오히려 로마의 멸망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들고 그 길을 따라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들고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회복의 역사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 Isaiah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묵 상>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승리를 노래한 장입니다. 1. 여호와의 종은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배척 받고 멸시 당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구절은 이사야와 또 다른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이 믿었느냐는 물음입니다. 메시야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메시야를 통해 나타났건만 무지한 우리는 그 메시야를 모르고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지한 백성임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선지자들이 외친 메시야가,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 메시야가 환영받지 못하고 멸시를 당했습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연약하고 볼 품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강하고 멋 있어야 환영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순이 자가 강한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보기에 볼 품 없고 연약했으나 죄와 사망을 무기 삼는 사탄의 권세를 파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승리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나온 싹은 온 땅을 적셔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와 그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보잘 것 없음이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실 기회요 영광을 이루실 기회임을 아십니까? 강해지려고 하지 말고 사람의 눈에 인정 받으려고 하지 말고 고난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2. 여호와의 종은 왜 고난 당하셨습니까? 그는 질고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징벌을 받으셨습니다. 맞으며 고난 당하셨습니다. 찔리셨습니다. 상하셨습니다. 징계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그만큼 잘못했기 때문이고, 그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여호와의 종이 당한 고난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받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난을 다 받으셨다는 사실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v.6).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 처럼 우리에게 담당하도록 주신 고난이 있습니다. 즉 주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고난 당하면 이웃과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슴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자가 되지 맙시다. 성공병에 시달리는 현대에서 우리가 비록 약하고 볼 품이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있음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과 슬픔을 잘 담당하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영광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고난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고난은 승리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닌다. <요 John 20장>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묵 상> 본문과 복음서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 요한, 제자들, 도마, 등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오백여 형제가 일시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확실합니다. 주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 보다 부정하는 것이 훨신 더 어려우며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해 줍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소문을 퍼뜨린 대로 제자들이 주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인봉한 무덤의 돌문 앞에서 삼엄하게 지키던 경비병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다급하고도 위험한 상황 중에서 주님의 시체를 둘렀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이 정돈되어 놓여 있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아멘. 2. 부활의 주님을 만남이 중요합니다. 주의 시체를 보러 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를 만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두려워 문을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를 만난 후, 용기와 담대함과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의 주를 만나고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Damascus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만나 그리스도의 증인(순교자)이 되었습니다. 슬픔, 두려움, 의심, 등은 결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증상들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무기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과 두려움과 의심이 떠나가고 기쁨과 담대함과 확신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3. 부활의 주를 만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지십시오. 본문에서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주를 사랑하는 열정을 가진 자들 이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께 모두 나를 내어드림으로 성령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 의지하십시오. 또한 예배하는 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가지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주 앞에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회개가 있을 때 주께서 기뻐하시며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활의 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영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요 John 21: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니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묵 상> 주님의 부활을 맞은 후, 첫 주일을 맞아 성도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부활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찾아 만나 주시고 또 특히 베드로에게 사도권을 회복시켜 주시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1.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 만나 주시고 숯불가로 초대해 주셨듯이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시며 초대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2. 부활의 주님은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번제에 필요한 장작을 이삭에게 지우고 모리아 산을 오르는 동안 하나님은 숫양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 진치고 여리고성을 젊령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앞서 보내셔서 만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그 성을 한바퀴씩 돌고 마지막 7일에 일곱번을 돌고 일제히 함성을 지를 때에 여리고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을 세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주님은 미리 동역자들을 준비해 놓으셨고 로마의 황제를 통해 도로도 미리 닦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때에 우리 주님은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에도 학업에도 앞서 행하시며 예비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3. 예수 없는 삶은 어둠이요, 예수 없는 힘쓰고 애씀의 노력은 탈진과 헛된 것 뿐입니다. 사람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에는 배와 그물이 안보이는 적당한 깊이의 물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며 그물을 내리지만 헛된 수고와 지친 몸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배의 오른쪽으로 그믈을 내리라는 방법에 따라 그물을 내릴 때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낚은 풍성함과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사업과 학업에 말씀에 따라 사는 삶 가운데서 153마리의 기적과 풍성함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본문은 주께서 처음 베드로에게 같은 장소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다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심을 증거합니다. 선교는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153마리의 기적을 체험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John 21:15-19>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묵 상> 부활하신 주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숯불을 지피시고 떡과 생선이 놓인 식탁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조반을 마친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 물으셨음니다. '숯불가 식탁'에 둘러 앉은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심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실패와 좌절로 인해 심령의 상처를 안은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상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수 있으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기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1. 주님의 물음은 제자들을(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며 소생시켜주시고 제자의(주님의 자녀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죽기까지 너를 사랑했다." "이렇게 부활한 후에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세번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세번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 주님의 고백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우리의 세번의 화답하는 과정을 통해 침체되었던 영혼이 치유,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권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윗 처럼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2. 주님의 물음 속에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신다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세번씩이나 자신이 지어준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이 적당치 않지만 아무리 부족하고 실패한 모습의 사람일찌라도 그대로 받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떠한 실수와, 어떠한 허물과 죄를 지었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사랑하겠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물음 속에는 이 세상의 무엇 보다 우선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님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모든 것이 온전해집니다. 찬양도, 기도도, 설교도, 섬김도, ... . 세상의 학위도 저술도 논문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사랑해야 모든 것이 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도 평등도 평화도 중요하나 인간을 사랑함이 더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함이 중요하나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하며 그래야 인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무엇 보다 주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온전해 질 것입니다.

  • 미국의 새로운 '예수 운동', 3만 5천명 회집 기도회

    미국의 새로운 '예수 운동', 3만 5천명 회집 기도회 바렛 신임 대법원 법관 임명, 낙태법 폐지를 앞두고, 워싱턴 DC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회 개최 2020년 10월 26일(미국 현지시간) ChristianHeadlines.com에 따르면 워싱턴 DC에서 대규모 기도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지난 주일 미국의 미래를 위해 워싱턴 DC에서 ‘ Let Us Worship 투어’에 35,000명 이상 모였다”고 보도했다. 또한 “ 하루 종일 여러 장소에서 모인 투어는 대법원 앞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신자들은 Amy Coney Barrett 판사의 대법원 지명을 위한 기도회와 예배가 있었다”고 했다. 국제 복음전도 교회(International Outreach Church)의 Charles Karaku 박사는 “수많은 낙태 문제에 대하여 개탄하여 이를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 워싱턴 DC 대법원의 계단에서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마른 뼈의 미국 계곡에 섰던 것처럼 느껴졌다. 낙태된 아기의 마른 뼈가 62,000,000개로 가득 차 있다 ”라고 그의 페이스 북에 썼으며, “ 그 많은 수의 낙태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인구와 동일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카루 쿠는 “ 미국 전역의 낙태 클리닉의 자금을 빼고 폐쇄하고 찬성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제거하고 교체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이 학살을 가능하게 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찬성하는 정치인과 일치하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적 신앙이 궁극적으로 책임을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그는 또한 “우리는 교차로에 있다. 지금이 대법원의 낙태 찬성법안을 뒤집는 것을 볼 때이다”라고 주장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집회는 또한 내셔널 몰로 이동하기 전에 대통령 교회와 링컨 기념관 앞에서기도했다고 했다. 또한 CBN 뉴스에 따르면 조쉬 하울리 상원의원은 이 집회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미국인들이“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 미국은 그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고 말했으며, 또한 그는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필요하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희망과 기쁨이 필요하다”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 Hawley 상원 의원은 신자들에게 Barrett 판사를 위해 그녀의 신앙과 삶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월요일 상원에서 배렛 판사에 대한 인준 모임이 있을 예정이다. 이날 젠 테젠 프랭클린 목사가 대규모의 집회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 놀라운 예배의 밤을 위해 @seanfeucht와 함께 DC에서 DC에서 설교하게 되어 영광이다. 우리는 수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영광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라고 트윗을 했다. 2021년 새해 전야에 ‘Let Us Worship 투어’ 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역사적인 오순절 부흥회인 ‘1906 Azusa Street Revival’ 과 같은 장소에서 특별한 모임을 열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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