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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하는 공동체의 길 (수1:3-9)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과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모세와 여호수아는, 장막을 가지고 진밖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쳤으며, 거기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구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으며, 여호수아는 끝까지 회막에 남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기도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째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머물렀던 회막(만남의 장막)은, 일상에서 구별되고/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곳으로서 오늘날 가장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시간을 내어놓고 하나님과 만나는 예를 찾는다면 새벽기도가 가 그러할 것입니다. 실제, 하늘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면, 이런 공간/시간을 확보하고 있음을 봅니다. :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이처럼 홀로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짐을 봅니다. 이것이 이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면에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의 특징:밤낮 무리속에 머물러 있고, 잠시도 혼자 있을 줄 모릅니다. 그들에겐, 독특한 감동의 메세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벽에 주님앞에 나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강한 존재가 되게 함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회막이 있어야 합니다. 회막/장막은 오늘날 주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섬기는 교회/내가 기도하는 자리/내가 주의 음성듣는 자리 - 그 회막이 있는 자가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꼭 교회갈 필요있나?하고 생각합니다? 작은 스마트 폰 같은 것이 모이기를 폐하는, 정한 장소-정한 시간에 우리를 내 영혼의 회막에 나아오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마치 모세의 놋지팡이가 희스기야시대에 우상품이 되었듯이, 나의 영혼의 영적훈련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느후스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회막의 축복을 놓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돈이 아니라, 회막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주의 전의 새벽기도 자리를 자식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에게 물려줄 때, 의미있는 영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40년을 광야에서, 기도를 배우고/기도로 훈련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기도를 통해 훈련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하나님께 받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임을 확신하게 합니다. 5. 6절의 말씀 -" 너의 평생에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호수아의 싸워서 이기고 정복할 대상은 대단히 장성한 민족이지만, 기도하고/또 기도할 때, 하나님은 두려움과 근심을 물리치고, 승리의 분명한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승리의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8절 -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고/주야로 묵상/말씀대로 다 지켜 행하라.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 말씀에 순종하면, 누구나 왕같은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말씀-하나님의 음성을 붙드는 것에 비례해서, 그리스도인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영혼에게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메시지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대로 살아볼, 순종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을 주십니다. 3절 -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발바닥으로 밟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가운데 걸음을 옮기는 순종을 말합니다. 순종을 통해 지명합니다. 네 발바닥 밟는 순종의 자리가 네가 얻을 축복의 땅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광야에서 기도의 훈련을 통과한 여호수아에게, 승리하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세가지를 말씀하시면서 사명앞에 나아가기를 요청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승리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승리의 삶을 살도록 강권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주여 ! 기도가운데 승리하는 공동체/주의 교회를 만들어가게 하옵소서 기도의 삶을 위한 회막중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기도의 삶을 통해, 세상에 대해 승리의 확신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승리의 분명한 길 - 말씀부여잡고 가게 하옵소서 승리의 삶을 위한 순종에 부족함없이 결단하며 전진하게 하옵소서
- 회막을 떠나지 말라 (출33:7-11 / 수1:-3)
영혼에 치매가 찾아옵니다. 영혼의 호흡이 맑아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 건강의 척도가 됩니다.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기도는 하면 한나절, 말씀묵상은 한두 시간 깊이 들어가야 영적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삶에는 하나님을 찬양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영혼의 호흡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앞에 복되게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흔히, 사람이 바뀌면 다 바뀐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바꾸기를 원하싣겠습니까? 영혼의 호흡이 긴 사람을 쓰십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40년을 쓰임받기위해 80년 준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더니, 성령님이 임하심고 온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40년 광야생활가운데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평소에 기도하며 준비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자기열심에 의해, 인생의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와주셨음을 통해 이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용하신 모든 사람은 어떻게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승리는 오는 것임을 믿고 기도의 손을 올리고, 이를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척박한 삶에서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필요한 최선은 바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세입니다. 주님 앞에 이기는 삶을 위해 회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회막은 만남의 장소, 하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시기위한 거처가 되는 곳인데 반해, 금송아지 사건이후 모세가 진밖에 회막을 두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가며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회막이었습니다. 모세는 기도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친구와 같이 만난 사람입니다. 모세가 회막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기위해서입니다. 회막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인생에 가지는 많은 원망 불평등 여러 가지 일 일어나는데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함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여 기도하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어려울수록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해명하고 이유 설명하고 논쟁할 필요없습니다. 주의 장막 가운데서 기도할 때 집, 교회, 자녀의 문제는 해결됨을 믿으셔야 됩니다. 사무엘은 나라에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지 못한 것 깨닫고 백성들 미스바에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도 들으시고 자녀들도 듣게 됩니다. 기도하면 살아난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갈 때 자녀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기도의 회막에서 주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출33:11에,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보다 더 기도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비서이기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세운것이 아니라, 끝까지 기도하는 그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호수아의 손에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회막을 떠나지 않는 기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 살기위해서는 기도하는 삶이되어야합니다. 사무엘처럼,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라 할 만큼 기도의 증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부모가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기도하는 소리를 듣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일이 너무 많고 세상걱정이 너무 많아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까? 주의 장막에서 하루가 궁궐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한 다윗은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한 사람이었고 그의 삶을 하나님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위해서는 주의 장막에 머물러야합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의 충성꾼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 교회가 살면 다 삽니다. 아멘
-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신34:9, 수1:1-3)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약속합니다. 새벽전에 주님앞에 부르짖을 때, 충만하신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성령충만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성경은 약속합니다. 새벽은 죄의 어둠이 물러가고/홍해가 갈라지고/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의 시간들입니다. 여호수아의 사명의 시작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수1:1)”로 시작됩니다. 그 이전에, 신34:9 말씀에, 모세에게 허락하신 사명이 여호수아에게 위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안수하자, ‘지혜의 영-성령’이 충만하게 여호수아에게 부어집니다.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하던 바와 같이 순종하며, 하나의 강력한 군대공동체를 만듭니다. 앞으로 여호수아가 행해나갈 모든 정복 전쟁에 있어서, 준비되는 모습입니다. 여호수아는 110년의 삶을 살악갔습니다. 첫 40년은 애굽의 노예로, 다음 40년은 광야에서 모세의 시종으로, 마지막 30년 쓰임받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여호수아의 남은 인생의 쓰임받음의 내용을 볼 때, 그의 인생은 승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신34:9 말씀을 보면, 모세가 기도하자 성령이 충만해지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사명앞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능력있는 기도로 탄생된 용사가 여호수아가 아니라, 이미 여호수아는 성령이 충만히 임할 준비된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40년 광야에서의 여호수아의 행적을 찾아가다 보면, 성경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중요한 전형을 한가지 발견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삶이 되지 못하고, 쓰임받는 예는 없으며, 모세가 신통한 능력으로 기도하니까, 갑자기 하나님이 쓰시는 능력의 사람이 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있을 때 이미 여호수아는 잘 훈련되었습니다. 앞으로 그의 인생이 전쟁하는 여생이라고 할 때, 그는 분명히 출17장의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 삶으로 체득한 승리의 원리를 익힌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광야 40년동안에 깊은 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통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들로 말미암아 가지는 동족에 대한 상처가 깊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상처를 되새기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깊은 상처의 아픔보다, 기도하는 모세로 말미암아 승리했던 더 분명하고도 감격적인 감동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가운데, 산 아래서 열심히 자신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 전쟁의 승패는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아닌,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승리하고, 손이 내려가면 전세가 역전됨을 본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의 핵심은 기도의 유무임을 깨닫고 배운 것입니다. 전쟁은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앞에 기도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배운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상처에 마음두는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신앙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난관과 어려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한 기도가운데, 승리했던 바로 그 순간을 훨신 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거기서 기도를 배운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몸소 배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세상에서 영적전투와 삶의 지경에서의 승패가 어디에 달려있겠습니까? 우리 손/기도하는 우리 손에 달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면, 우리 자신과 삶의 정황에 변화가 나타나고, 기도의 손을 멈추면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덮게될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납니다. 요단을 건너고/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모든 믿음의 싸음에 앞서서,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앞에 기도함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새벽미명에 주님앞에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오늘날도, 새벽마다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 자녀/가정/가문이 변화되고, 주님의 교회에 부흥이 찾아오며 승리의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변화/승리/부흥은 오직 우리 모두의 기도에 달려있음을 기억하시고, ‘모세가 죽은 후에...’처럼, 인생의 질곡같은 문제를 만나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마시고 기도의 손을 높이 올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의 무릎을 꿇고
설교일 : 1006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단6:10 설교 / 한결같은 기도의 삶 (단 6:10) 기도는 영혼의 호흡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가운데,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호흡은 생명유지의 필수조건이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신앙이 병들었다 혹은 죽은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기도를 멈추는 것이 생명주신 하나님앞에서 영혼에 치명적인 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영혼의 호흡인 기도와 생명력있는 참된 신앙은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도의 삶을 사는 분들을 보면, 삶의 지난한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후에는 ‘마음이 시원하다’라고 말씀들 합니다. 이것은 기도가 영혼의 호흡인데, 호흡에 들숨과 날숨이 있듯이, 기도를 통해 우리안에 있는 ‘염려/근심/걱정/상처/아픔/한숨쉴만한 것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고, 하나님 주시는 생명력을 그 영혼이 들숨으로 흡입하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어 기도하고 부르짖음이 사는 길 간혹, 걱정과 염려가 지나치면, 혀 좌우가 헐어지고/혀 안쪽에는 바늘같은 것이 돋고/입안이 바짝 바짝 마르게 되고/마침내, 밥맛도 없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근심과 염려가 혀에서부터 제일먼저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런 어려움의 순간에도 다시 입을 열어 혀를 사용해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영혼의 불안과 염려를 혀로 토설케하실 때에, 마침내 입안의 혀를 움직여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시작할 때, 몸 전체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의 말씀이 실제적으로 능력있게 임하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기도하고 부르짖음이 살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자가 되기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산 제물(Living Sacrifice)과 예배의 열납 기도가운데 우리영혼이 살아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예배의 온전함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에 ‘하나님앞에 죽어있는 것은 산제물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는 살아있는 생축의 제물(Living Sacrifice)'이 될 때 열납하심을 말씀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생축-흠없는 제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7장22절에 호흡있는 것은 다 죽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호흡이 멈춰지는 것은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영혼의 호흡임을 절대적으로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예배가 산제물로 열납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육신은 신체장기의 작용으로 움직여질지는 몰라도 영혼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죄의 찌꺼기들이 죄와 상처라는 이름으로 우리속에 남아 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서 영혼의 호흡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함으로, 내 속에 더러운 것과 지저분하고 추한 것들이 입술의 기도를 통해 계속 밖으로 나오게 되어지면 우리의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앞에 흠없는 온전한 제물로 열납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영혼의 호흡자-다니엘 본문은 하나님앞에서 영혼의 호흡을 쉬지 않았던, 그래서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소개합니다. 그는 하루에 세번씩, 상황에 상관없이 영혼의 호흡을 쉬지 않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숨을 쉬듯, 무시로 기도의 호흡이 살아있었던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의 삶을 하나님이 산제물(Living Sacrifice)로 흠향하시고 사용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의 특징은 쉬지않는 한결같음에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었다고 했습니다. 한결같은 신앙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이 왜 한결같은 아름다움입니까? 하루 세 번의 고정적인 시간은 의식적으로 긴장하고 깨어있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인교회에 허락하신 고정적인 기도시간의 축복이 ‘새벽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기도회 나오시라고 했더니, 자다가 깨면 오겠다고 합니다. 평생 나오기가 쉽지 않는 분입니다. 새벽기도는 가장 고정적인 시간에 영혼의 호흡이 가능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전날 밤부터 의식하고/긴장하고/노력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우리에게 복음전해준 미국교회에는 새벽기도회가 없는데, 왜 미국까지 와서 평양 길선주 목사가 시작한 새벽기도회를 해야 하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상식입니다. 미국교회가 우리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습관적으로 새벽미명에 기도하러 가신 것’을 보면, 주님께서도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의식적으로 고정적인 시간에 기도하기를 애쓰셨음을 알게 합니다. 물론, 그가 아침일찍 기도하러 가신 것에 대해서는 두곳에서 (막1:35/눅4:42)언급하셨지만, 이 두 번의 기록을 근거로 예수님이 3년동안 딱 두 번만 새벽기도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365일 주님의 일기책이 아니라는 것과 마가복음 1장이 주님의 하루일과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소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국교회의 현실을 뛰어넘는 주님의 삶의 내용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신앙의 표준이 미국교회라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교회의 동성애 합법화 등의 문제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무릎꿇은 다니엘 다니엘에게 하루 세 번 무릎을 끓었다는 것은 그의 기도시간이 확실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다니엘처럼, 성도들과 목사님들 가운데 자신의 고정적인 기도시간이 분명한 분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셨음을 봅니다. 목회의 열매가 풍성한 어느 목사님에게 겸손히 그 비결을 물어보았을때, 그 목사님의 말씀하시는 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 저희 부부가 30년동안 새벽무릎을 꿇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이민교회도, 새벽을 깨우며 고정적으로 기도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시고 부흥을 허락하시는 것을 봅니다. 비록, 이른비의 축복이 없더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릎꿇을 때에 반드시 늦은 비의 은혜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고정적인 기도의 시간으로서의 새벽기도시간에 자신을 하나님앞에 붙들어 매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호흡의 생기가 넘치는 삶을 허락하시고, 무엇보다 늘 기도하는 그 성도의 삶의 예배를 열납하시고 축복하시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삶의 환경을 넘어서는 한결같은 기도 또한, 다니엘과 같이 한결같이 기도의 무릎을 꿇는 사람은 죽음의 상황앞에서도 환경을 넘어서는 기도의 무릎으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속에 담대하여지고, 하나님앞에 살아있는 제물로 열납되어,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시대와 세대를 넘어서서 나라와 정권이 바뀌어도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늘 무릎꿇기를 각오하고 사는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사용하시고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감사를 드리는 한결같은 기도 다니엘과 같이 한결같이 기도의 무릎을 꿇는 사람은 믿음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 절 마지막 부분에, 다니엘이 감사했다고 기록합니다. 다니엘이 어려움중에 드린 기도는 참된 믿음의 감사였습니다. 감사할 것이 있어서 축복의 맛을 본 다음에 드리는 것도 물론 감사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감사는, ‘삶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데 - 나의 계획은 이러하지만, 하나님께서 어찌하시던 그것이 나의 인생에 최고의 좋은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는 바로 그런 고백속에서 드려지는 것이 참된 믿음의 감사가 온전한 감사인줄 믿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다니엘에게 사정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긴박감이 흐릅니다. 원수들과 사망의 죽음이 눈앞에 놓여져 있음습니다. 사자굴에서 죽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믿음으로 감사하는 다니엘을 봅니다. 사자굴에 들어가게 상황에 자신을 매지 아니하고 죽음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믿음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막광야같은 이민땅을 살아가면서 기도의 호흡을 쉬지않기를 축원합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앞에 무릎꿇음으로, 기도의 호흡을 쉬지않고 이어가며, 상황을 뛰어넘는 담대함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열납하시고 사용하시는 믿음의 귀한 권속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삶의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설교일 : 0925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왕하18:36-19:7 본문은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던 히스기야를 공격하는 산헤립의 침략과 그에 대한 히스기야의 대응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산헤립은 하나님과 지도자 히스기야를 백성들이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공격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달콤한 말로 유혹의 손길을 펴기도 합니다. 본문의 히스기야는 이 모든 조롱과 모욕, 두려움의 말들앞에 신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어려운 순간들 앞에서, 그의 신앙적인 태도와 조치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참된 인생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도약하는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I.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도,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히스기야는 왜 바보처럼 최강대국 앗수르에 대해, 반대정책을 취했습니까? 이유는 한가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처럼 우상의 나라로 망하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왕들이 감히 하지 못한 ‘산당’과 ‘모세의 놋뱀’까지도 제거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어려움이 찾아들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겠다는 그 목표를 위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초강대국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이토록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인생의 진짜 어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어려워졌느냐는 회의에 빠질때입니다. 그런 때에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뜻가운데 있음으로 어려운 것이다’라고 믿으십시오. 내가 하나님편에 서 있음으로, 외려 사단의 공격목표가 됨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와도, 결국에는 히스기야처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져 주시고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사람앞에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가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의 대표들이 흔들리면 겉잡을 수 없는 일입니다. 히스기야가 보낸 사신들이, 산헤립의 군대장관 랍사게를 통해서 별의 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인 히스기야를 불신하는 말, 히스기야를 배신할 때 줄 수 있는 아주 달콤한 것들로 유혹합니다. 그러한 말들에 대해 저들은 말려들지 아니하고, 히스기야의 지시대로 지혜롭게 침묵합니다. 히스기야가 미리 주의를 준 것은, 입을 열어 저항했을때 혹여 말의 실수를 구실로 그냥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대화를 지속하다보면 그들의 농간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삶을 돌아볼 때, 사단은 심각한 문제의 대화속에서, 감정과 혈기를 타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같이 말로서 맞불을 두지 않음으로, 사단에게 구실과 틈을 주지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교회가 어려운 경우들을 보면, 거의가 사단이 이용하는 말의 전략들에 말려들 때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에 대해, 침묵하는 지혜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III.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회개의 심령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의 말을 전하는 대신들과 함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본문 자체에 그런 부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둘렀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마음이 가난해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앗수르의 1차 침입때, 금은을 가지고서 쉽게 타협했던 자신의 부족함과 범죄를 겸손히 고백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문제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회개하는 가난한 심령이 중요함을 기억하시기 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때, 마음이 담력을 얻어 믿음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순종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IV.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가십시오. 히스기야는 위기를 극복할 줄 아는 참된 지혜를 가진 신앙인입니다. 그는 모든 좋은 것,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군대장관이나, 모사(해결사)가 아닌, 하나님의 성전으로 문제를 들고 올라갑니다. 자신의 연약함에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가 필요함을 아는 바른 자세입니다. 믿음의 좋고 나쁨을 떠나, 문제는 늘 발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망하는 자리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인해서 더욱 흥왕하게 됩니다. 찾아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자는 세상군왕을 향해 가지만, 흥하는 복있는 사람은 기도하러 성전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회개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찾는 이에게, 은혜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움의 장막을 걷어내는 참 비결이 됩니다. V.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기도를 부탁하십시요. 히스기야는 자기자신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자기 기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자기의 간절한 그 기도를 극대화시키는 행위가 됩니다. 또한, 그가 겸손하다는 것과 말씀을 참되게 의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 선대의 왕도 있었지만, 비록 그의 신분은 왕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겸손히 부탁하며 하나님 말씀의 직접적인 증거를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에, 기도의 제목을 서로 나누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겠다는 헛된 약속을 남발하기 보다는, 짧게라도 그 자리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사단의 공격에 대해 합동작전을 펼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VI.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신앙의 도약점임을 기억하십시요. 절망과 낙심은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경험중에서도, 최악의 것입니다. 그 절망과 낙심이 자기를 영원히 망하게 할 것이란 생각에서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입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겐, 앗수르 대군의 침입으로 인한 절망이 오히려 하나님안에서 담대함과 영적인 풍성한 재산을 얻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애병필승(哀兵必勝)’이란 말이 있습니다. 패배를 딛고 일어선 군대가 이긴다는 뜻인데, 고난을 경험하고,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더욱 견고해 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도 동일할 것입니다. 지독한 어려움을 당하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으로 해결해 본 사람은, 비록 이땅에서 끊임없이 어렵고 두려운 일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분명한 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성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막광야같은 이민생활을 합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어려움들이 우리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도,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사람앞에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기도하는 회개의 심령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가십시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신앙의 도약점임을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성공하시고 승리하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인생의 요단강앞에서 (수 3:7-13)
설교일 : 0923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수 3:7-13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축복의 가나안을 맛보기 위해 최대의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요단강을 반드시 건너야할 사명이 저들앞에 놓여 있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항상 요단강의 어려움들이 우리의 신앙과 삶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말씀가운데, 삶의 요단강을 건너는 비결을 배우시고, 가나안의 형통과 축복을 맛볼 수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I. 포기하지 말라. 인생의 축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축복의 장애물인 요단을 건너지 못하면 저들은 광야에 머물러야 합니다. 광야는 위험과 기근과 사단의 출몰함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 길을 걸으며 은혜를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이제 그 광야길을 지나왔으면 성숙한 믿음으로 이제는 가나안을 향해 요단강에 믿음의 발을 내어디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순리입니다. 이 순리앞에 결코 포기하거나 연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잠시 귀를 즐겁게 하는 교양강좌를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과 질곡같은 삶의 어려움들을 벗어버리고 축복의 가나안을 맛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힘입어서 승리의 축복을 맛보기 위해 교회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죽도록 고생만 시키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복 주시기 원하시는 내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단강앞에서 안빈낙도를 꿈꾸지 마십시오. 초막을 짓고 살려하면, 그 초막이 마르고 바람에 날리우는 날에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게 됩니다. 축복의 땅으로 나아가기를 방향을 정하시고 멈추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II. 오늘 순종하라 7절 말씀에 ‘오늘부터 시작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지금부터 매일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고 순종할 때, 분명한 승리가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의 결단과 승리가 있음으로 계속적인 큰 승리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원리는 단순합니다. 오늘부터 당장 순종하는 사람과, 매사에 내일부터가 입에 늘 붙어다니는 사람의 작은 차이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늘 좋은 사람이 되시고 오늘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을 잘 살지 못하면서, 미래가 축복가운데 거할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개처럼 벌고 있을 때도 자기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 개같은 인생(?)으로 살다가, 잠시 귀족의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축복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세월, 상실의 계절도 유한한 인생에겐 결코 반복되지 않는 최고의 복된 계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고 곳간을 넓히고, 자기의 영혼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인생에게 주님은 ‘오늘밤 네 영혼을 찾으시면, 네 재물은 뉘것이 되겟느냐’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주님도, 교회도, 복음도 없이 열심히 벌어 모았는데, 하룻 밤에 영혼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 보면 ‘심장마비’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작별인사도 없이, 그토록 단 한순간도 없으면 못 살것 같은, 핸드폰까지 다 내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오늘의 최선, 오늘 믿음의 도전, 오늘 받을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 복된 영혼이요, 위기의 요단강앞에서 낙심치 아니하고, 기적을 맛보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은혜가 있고, 오늘의 날에 순종과 최선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승자가 매일의 승자가 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을 마지막 생명의 날처럼 살아갈 때, 주의 도우심으로 인생의 요단강을 평안히 건너게 될 것입니다. III. 말씀을 선포하라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제사장들이 앞장 설 것이며, 언약궤와 2천규빗이 되게 합니다. 2천규빗의 거리를 둔 것은 모든 백성이 언약의 말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거리입니다.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축복의 장애물인 요단강을 향해 전진하라는 의미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이 될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의 질곡같은 문제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함이 하나님의 능력 베푸심의 시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의 임재의 동행을 경험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고, 인생의 오리무중같은 짙은 안개는 말씀의 빛가운데 환희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영적 요단강을 건널 때도, 영적 가장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에 자녀들에게 핑계하는 부모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너도 아버지 돼 봐라.’ 아내에게 ‘당신도 내 입장이 돼봐라.’ 그런 힘 빠지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애들아!, 여보!, 말씀가운데 마음을 강하게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고, 하나님 바라보면, 반드시 형통케 하신다고 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위기를 바람에 날리우는 마른 풀과 같이 하신다고 하셨어. 할렐루야!’하고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렇게 어려움의 순간에 말씀을 선포하는 가장이 있는 가정, 그 가정은 어떤 요단강앞에서도 보석같은 믿음의 명문가문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앞에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은혜가 열려질 것입니다. IV. 말씀에 화합하라 요단강이라는 최대의 난관앞에서 여호수아는 말씀을 선포했고, 백성들은 그 말씀에 화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 눈앞에 추수기에 언덕까지 차오르는 요단강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 중심을 향해 방향을 한가지로 하고 나아갑니다. 말씀은 인생의 방향을 보게 하고, 믿음은 그 말씀에 화합하여 팔다리를 움직여 구체적인 순종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들에게 여전히 육신의 눈이 열려있었지만, 말씀과 함께하는 믿음의 눈으로,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며 앞을 향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말씀에 온 마음으로 화합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지상교회가 불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땅/가나안의 비젼이 나타났음에도, 요단강물을 두려워하고 쉽게 분쟁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등하고 분쟁하는 문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말씀에 주목하지 못하고, 말씀을 말씀으로 선포하지 못하는 영적인 무기력함과 성도들이 말씀앞에 온전히 화합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결국, 발길을 말씀의 지시하는 반대방향으로 돌리다가, 광야에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방황의 끝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자와 성도님들이 하나가 될 때,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연주곡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겸손하게 화합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 아기가 뜨거운 국에 손을 대지 말라고 가르치기보다는, 한번쯤 대어보고 뜨거운 줄 알면 더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용감한 부모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일부러 뜨거운 난로에 손을 대게 하기 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화가 된다고 가르치고 주의를 주는 부모입니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지 해보고 싶은 것은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교육된 자녀들은, 죄악의 문제앞에서도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진짜, 지혜롭고 믿음있는 부모와 자녀는 말씀의 경고와 가르침을 신뢰함으로 실패의 과정을 쉽게 지나, 축복의 날들을 더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늘 말씀 듣는 귀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감동앞에 단 마음으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인생의 요단강을 아무 문제없이 쉬 건너시는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V. 밟고 멈추어라 13절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었다는 말씀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요단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물을 밟고 멈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15절 말씀을 보면, 요단강이 홍수가 날 정도로 범람하던 시기였음을 말합니다. 이 정도 되면, 강물앞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아마도, 저들의 주특기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왜 하필 이때 건너야 하는가? 저 물을 한번 봐라.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서는 물귀신 만들일 있냐? 등등의 원망과 불평일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가더라도, 큰 위기의 순간을 당하는 경우에는 머리로는 이해하는 말씀이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봅니다. 아마 바로 이런 순간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미리 대처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발을 멈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을 만큼, 말씀에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위기와 두려움과 재앙이 눈앞에 찾아오는, 바로 그때에 발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발을 멈추고, 그 넘치는 강물을 보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최선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후에, 나머지는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내가 할 것이이게, 나에게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위기와 큰 난관앞에 직면하여 발을 멈추는 일이, 결코 시간낭비/불필요/쓸데 없는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앞에서, 불평과 원망의 순간에, 입술을 닫고/침묵하며, 말씀을 마음에 품고서, 기도가운데 하늘의 도우심을 앙망하고/기대하는 것은, 천천과 만만의 군사의 힘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발을 이리 저리 많이 움직이며, 사람의 도움을 찾아다닐 때, 한번 더 금식/한번 더 기도하며, 하늘의 지혜를 구하였고, 그 위기를 하나님의 기적같은 도우심으로 이겨내었노라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저들은 요단강앞에서 하나님을 기대하며, 멈추어 섰는데 이것이 바로 저들의 믿음입니다. 위기의 때에, 많은 인간적인 방법들을 내려놓고, 기도의 불을 끄트리지 않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위기의 순간에 발을 멈추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여전히 나약해서 방향을 틀어 광야에 머물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을 과신해서 이리 저리 발을 움직이며 물에 뛰어들었다가 강물에 떠내려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말씀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도의 기다림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기대할 수 있음이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인생의 위기와 같은 요단강앞에서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으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매일 매일 말씀앞에 최선의 순종을 드리십시오. 위기의 일들 앞에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화합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더욱 크지고 가까이 직면하게 될 때, 발을 많이 움직이지 마시고, 발을 멈추어 기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눈앞의 요단을 건너 언약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의 땅, 가나안을 얻고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교회를 사랑함이 형통입니다
설교일 : 0916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시122:6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시편 122장 6절 ) 예배가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심각한 영적공황의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예전처럼 교회를 핍박하는 부당한 공권력으로 인한 예배의 폐지는 아니지만 교회들 스스로가 전통적인 예배의 시간들을 점차 없애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지으시되 예배를 통해 최고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신데, 인간 스스로 예배를 폐함으로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온전한 축복들을 쉽게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가 최고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통로를 스스로 폐쇄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 값싼 신앙 신앙생활은 예배생활과 교회생활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교회에 갈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에는 몇 분의 선호하는 스타 목사님들이 앱으로 연결되어있고, 특별히 좋아하는 목사님, 친정 목사님, 친구 목사님, 상담 목사님 등등. 말씀의 홍수 속에서 그저 원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의 감정적인 동의만 있으면 큰 은혜 받았다고 쉽게 말합니다. 문명의 도움으로 인해 그런 은혜를 받을 수만 있으면 장소는 상관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불속에서 속옷차림으로 발가락으로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해도 쏟아지는 말씀 속에 스스로 참된 예배자로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혼을 좀먹는 대단한 착각입니다.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점점 더 강도가 세어지지 않으면 감동이란 것은 나중에 맹물 숭늉 맛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듣기는 많이 듣고 아는 것도 많은데 삶의 온전한 헌신과 변화가 없게 됩니다. 신앙은 변화이며 변화의 결론은 헌신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씨앗이 흙에 떨어져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가는 과정의 변화를 통해서 열매라는 결론을 맺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열매를 볼 수 없는 값싼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전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새벽과 주일날 들려지는 그 말씀 한절 한절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고 교회 가는 일에 늦어지면 장로님이라 해도 그 벌을 면할 수 없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씀의 홍수임에도 열매를 보기 힘들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뚜렷한 현상이 교회중심적인 삶의 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집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신이 아닌 이상, 영으로만 어찌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영혼의 그릇인 몸이 눈에 보이는 예배당으로 나아올 때, 온전한 영적인 예배가 몸의 순종을 통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시대성이 진리의 다양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내가 섬기는 바로 그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헌신해야 될 한 교회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출발점-교회 예전에 한국에서는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보고는 ‘교회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말이었고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반드시 그 자신과 가문이 귀한 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지독하게 예수 잘 믿는 집안, 결코 망한 예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려울수록 더 새벽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힘들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삶이 힘들어서 신앙생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원래 신앙이란 것은 ‘어려울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인데, 외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핑계가 삶의 어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은 삶대로 어려워지고, 삶의 어려움을 뒤엎어놓을 능력의 신앙심도 없다보니 결국은 영육 간에 실패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교회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교회에 엎드려 부복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삶’을 살라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많은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자신이 산제물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가 아닌 예배를 주관하고 인도하는 소수의 설교자와 찬양대 등 앞선 이들을 바라보는 보는 예배가 되어질 때, 결국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 예배는 설교자와 소수의 인도자를 보면서 평가하고, 설교를 중심한 예배를 잘하고 못함의 평가를 가져오는 엉터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마치 구약의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신을 섬기듯이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서 자기 기준에 합당한 설교목사를 발달문명의 기계 속에 세워두고 생명 같은 예배를 스스로 망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이 제일 큰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곳 교회를 온전한 믿음으로 섬겼던 분들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당신들과 함께 하심을 믿었지만 동일하게 저들이 구체적으로 확신한 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예배당 교회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과 그곳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의 작은 물품하나 마저도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생각하였으며, 눈에 보이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피같은 물질도 아낌없이 그리고 마침내 삶 전부를 다 드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헌신의 섬김을 받으시고 한량없는 은혜로 넉넉히 되갚아주시는 아름다운 은혜의 전성시대-믿음의 명문가문들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고 그 하나님은 내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중심으로 삶의 일들을 재편하십시오. 교회를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십시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라는 것이 율법적이요 교회주의자 같은 얘기라고 비판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율법주의자가 될 마음도 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저 찾아가서 안기기만 하면 어머니품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자람과 성숙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늘문이 항상 열려있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함으로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지고 좋은 것을 넘치게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다윗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노래의 핵심인 본문은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위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형통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궁중에는 형통이 있다 하였습니다. 평강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은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오늘날 교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시편121편의 눈을 들어 산을 보라합니다.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주님의 성전이 있는 곳, 오늘날의 교회를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형통함과 평안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중심한 삶은 예배의 삶을 말합니다. 주님의 피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합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몸을 드려 예배합시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한 삶을 살아갑시다. 내가 섬기는 목사님이 분명한 신앙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때에,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온전히 붙들 때, 영육 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형통이 있을 줄 믿습니다.
- 비젼을 성취하는 삶 - 안돈시켜 가로되
설교일 : 0901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민13:26-14:10 본문 말씀은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지파별 대표들이 회중들앞에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보고의 내용이 두 편으로 나뉘어집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은 에스골 골짜기의 포도송이며, 석류, 무화과등의 현실적인 풍성함과 부요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장대한 족속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헌신하며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두편으로 나뉘어 집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둘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면서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한 헌신의 부담스러움에 주목합니다. 자신들은 메뚜기같은 존재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자신들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와 같이 두 부류로 나뉘어짐을 봅니다. 같은 일을 두고서도, 관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하고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그 관점(Viewpoint)을, 그가 가진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사람은 그가 가진 믿음이라는 그 관점을 통해, 그 믿음만큼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I.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사람의 감관(感官)은 보다 정확한 앎을 위한 것인데,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사람의 육안으로 본 것이 절대로 온전한 앎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흔히, ‘보고 믿겠다. 내 눈으로 봐야 인정하겠다.’라고 하지만, 온전한 앎에 이르는 것은 결코 감각적인 눈으로만은 너무나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과정에도 영안이 열려야 한다는 말을 쓰는데, 결국 이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아래 보아야 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먼저 열릴 때 너의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눈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생명을 주실 때에도 보는 것 보다 듣는 것을 먼저 열어주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의 소중한 믿음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부터(롬10:17) 생긴다는 것을 보면, 결국 잘 듣는 것이 좋은 믿음임을 알게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보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증거물 까지 가져와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이 보았던 사실(fact)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백성들이 두려워 소동을 합니다. 이에 갈렙이 속히 백성들을 안돈 시키고자 애를 씁니다. 그 결과 갈렙은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은 대신에, 나머지 정탐꾼과 저들의 말에 동조했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사실(fact)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들을 징계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보는 것만을 가지고서, 세상 사람들 처럼 ‘믿음없는 말, 신앙없는 말’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악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문제로 법정에 갔다고 하면, 그 판사는 틀림없이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fact)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믿음으로 말할 때는 이것이 전혀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실 그대로, 그들의 평가는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심각한 말이 됩니다. 전달하는 과정이 참으로 악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들의 판단이 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II. 믿음과 신앙의 언어를 사용. 말을 똑바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속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들 신자의 삶속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들도 망할 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 민족, 교회가 망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열명의 믿음 없는 리더들의 말로 인해서, 이백만 백성이 그 말을 따라가다가, 광야에서 거의 매일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말들 가운데, 믿음의 말-신앙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가운데 믿음의 말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열명의 정탐꾼과 같은 말을 한다면,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이루는 교회나 가정으로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수아나 갈렙 같은 사실을 넘어서 신앙의 말들을 한다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엄청난 능력과 축복의 증거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생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린 것을 봅니다. 열명의 정탐군들은 보는 일에는 탁월하고,말 전하는 데는 탁월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력은 바닥을 치는 아주 믿음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말씀의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닫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믿는 만큼 말씀을 기억하게 되고, 그 말씀을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데, 믿는 만큼 말하고 믿는 만큼 살아가게 되는 데, 그 믿음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없음으로 후에는 믿음의 사람들을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고 사는 삶만큼 하나님앞에 불행한 인생이 없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악평하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해하려 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갈렙을 봅시다. 그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30절에 갈렙은 백성들을 ‘안돈시켰다/안전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을만 하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말라.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그 말로서 백성들을 안돈시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결과적으로 듣지를 않았지만, 오히려 돌을 들어 치려했지만, 모두가 배신하고 등을 돌렸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갈렙을 인정해주시고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과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정정한 건강과 땅을 취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갈렙같은 사역자, 중직, 성도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III. 교회에 큰 일은 없음. 가끔씩, 교회에 나타난 현상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교회에 큰 일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무엇입니까? 다만 갈렙처럼 볼 수 없는 믿음없는 자기자신이 존재할 따름인 것입니다. 문제를 온전히 다룰만한 자신의 믿음이 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큰 일났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일이라고 말하는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믿음 없음이 진짜 큰일입니다. 만약 나의 믿음이 갈렙같을 수만 있다면, 설령 교회의 큰 일 같은 문제도 해결이 될 것이며, 그 사람은 갈렙처럼 외려 혼돈한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함께 위대한 믿음의 보상과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갈렙에게 우리는 많이 배워야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만하다가 나와서 폼나는 믿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왔고,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을 안돈시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악조건인 것을 알지만, 그의 모든 관점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위에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가문과 가정을 일으키고 교회를 복되고 안돈케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갈렙이라는 사람을 보면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교회의 비젼과 꿈을 잊지 않고, 보고도 다른 말 하는 세상에서, 오직 믿음으로, 보지 않은 것도 보는 것처럼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다 변해도 갈렙처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시고, 건강주시고, 일평생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 회복의 축복
설교일 : 0901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룻4:7-10 본문이 기록된 4장은 모압여인 룻의 인생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의 마지막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부분입니다. 한 이방 여인 룻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된 축복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금 당장 좋을 뿐, 미래의 약속이 없으면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미래가 없는 사형수에게 제일 좋은 것을 마음껏 제공하는 불행한 관용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축복은 미래의 회복을 향해 나아감 룻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은 미래의 소망과 약속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지향하는 바가 뚜렷합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생명과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영원한 만족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지향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앞선 부분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문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룻은 모압으로 이민 온 이스라엘 사람 엘리멜렉 가정에 시집온 모압여인 입니다. 그의 시댁 엘리멜렉 집안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싫어서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과 함께 도망치듯 이민 온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흉년을 피해서 왔다고 단순하게 기록하지만, 실제 그들이 살던 시대가 사사시대였으며 이민의 직접적인 원인이 흉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징계라는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흉년은 국지적이지 않습니다. 저들이 살던 곳 베들레헴과 모압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님에도 이스라엘은 흉년이 들고 모압은 양식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베들레헴이란 마을의 이름 뜻은 ‘떡집’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곳에 흉년이 들어도 마지막 최후의 보루가 베들레헴은 흉년들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최악의 흉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웃한 모압나라에는 양식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흉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분명한 징계와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때에 피하지 말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앞에서는 꼼짝달싹하지 말고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결코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앞에서 도망가는 순간 완전한 절망밖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실제로 엘리멜렉이 집안이 그 표준이 됩니다. 엘리멜렉 자신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젊어서 자식도 없이 죽어버리고, 이제는 두 이방 여인 며느리만 남게 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철저하게 망하면서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 나오미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의 징계가운데 들 때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나아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서 피할 방도를 구하지만, 도리가 없음을 봅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해법을 찾겠다고 나서는 만큼 더 세상앞에서 손가락질 받고 더 완벽하게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거나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형의 교회는 영원할지 몰라도, 지상교회를 완전하게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가르침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붙어있지 아니하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을 알 때, 함부로 교회안에서 자기 목소리로 떠들지를 않게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앞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르고, 교회를 어머니의 품과 같이 기쁘게 대할 때, 영원한 생명력이 교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싹’을 잘라놓으시는 분이십니다. 1장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땅을 떠날 때, 자식을 둘 수 도 없고, 둔다고 한들 ‘소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룻1:11-12). 이것은 계대결혼을 염두고 두고 한 말입니다. 계대결혼 시킬 자식하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택한 백성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인간적인 제도와 수단과 통용되는 모든 방법까지 아예 ‘싹’을 잘라놓고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타락하여 하나님 앞을 떠났을 때, 하나님앞에 두 손 두 발들고 나아오는 것 외에는 교회의 회복을 위한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자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 반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집에 머무는 자, 당신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의 삶은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미의 집안과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심판의 수단으로 국지적일 수 없는 흉년을 사용하여서 심판하시듯, 하나님은 구약의 가정교회인 이삭의 집안을 축복하시는 방편으로도 흉년을 사용하신 예가 있습니다. 이삭의 가정 교회는 순종과 형통의 모범이 되는 교회입니다. 이삭은 전공이 농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순종과 그 결과를 보면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이후 이삭의 별명은 하나님앞에서 형통과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그 이삭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주변은 다 흉년들었음에도 유독 이삭의 가정은 백배의 결실을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모두가 흉년들고 어려워도 당신에게 꼭 붙어있는 당신의 교회와 백성들 만큼은 풍년의 축복을 허락하실 수 있는 분이시면서, 또한 반대로 모압과 같이 가까운 이웃 나라가 풍년이 들어도 징계 아래 흉년으로 끝장을 보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 뿐 아니라, 축복과 심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인생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당장 심판과 징계의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의 교회를 붙들고 늘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축복받는 교회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사나 죽으나 주님 앞에 꼭 붙어있는 교회가 결국에는 세상이 다 망한다 해도 승리하고 이기는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회복의 시작은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 영육간에 실패하고 초라해진 늙은 시모 나오미에게 유대땅에 양식있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집나간 자녀와 타락한 교회를 세우고자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 복음인 것입니다. 이에 늙은 나오미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몸을 돌이킵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이 희락과 기쁨임에 반해, 스스로의 이름을 ‘마라’로 부를 정도로 쓴 맛이 나는 괴로운 인생의 형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어떤 위로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이켰을 때에, 10년 만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맞이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그가 어느 정도 유력한 집안이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마라’라는 쓴 맛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미 마음이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으로 초라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순간 회복의 역사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임을 아는 두 자부에게 돌아가기를 권합니다. 나오미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기에, 두 며느리는 살길을 가도록 합니다. 결국, 동서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에게 받았던 말씀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하면서 나오미의 치맛자락을 바짝 붙잡고 굳게 결심함으로 어머니를 좇아갑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완전히 알거나 이해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인 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조금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배웠던 것입니다. 룻은 희미해 보이지만, 바로 영혼을 살리는 그 부스러기 같은 말씀을 붙들었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인 어머니를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분명한 회복의 길 룻이 가보지 않은 베들레헴을 갈 이유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인 어머니가 들려준 말씀이 좋고, 그 교회가 말씀을 따라 살려는 것을 볼 때,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 안에서 갈길을 밝히 보여준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좋은 것이라고 믿고 결정해서 가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는 정도가 아니고, 자신도 거기에 생명을 걸고 니오미처럼 좇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예비된 하나님의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앎일지라도 결단하고 결심하고 단 마음으로 순종하며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단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자비하심의 은혜와 축복의 문이 서서히 열려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단의 돌이키는 마음과 순종의 팔다리를 움직임으로 하늘 문이 비로소 열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사역가운데, 연말이 되면 신년부터는 사역을 멈추겠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교사로 가르쳐 보니까, 찬양단으로 봉사해 보니까,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좀 더 배운 뒤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것을 깨우치고 안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겠다는 것은 교만일 따름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작정하는 순간 실제 하나님의 무궁한 능력은 그 사람의 지식에 갇혀 버리고 제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식이 부족하고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교회가 원한다고 할 때 겸손히 순종하는 삶의 자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룻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룻에게 교회인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고 들은 말씀을 따라, 거기에 생명을 걸었을 때에 상상치 못한 기적같은 일들이 룻앞에 예비되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잘 몰라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앞에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를 마음껏 받아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모든 좋은 것이 존재함 이스라엘 베들레헴 땅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마라’라 스스로 칭하는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의 통치하시고 다스림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하나님이 구체적인 도와주심과 예비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어머니를 열심히 따르고, 봉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이 예비한 보아스를 만나도록 하십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로서 베들레헴의 유력자입니다. 그들의 잃어버린 재산을 찾아주며, 장래에 모압 여인 룻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서 엘레멜렉 집안을 잇도록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겨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주님이 허락하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인격안에서 만나게 될 때, 우리 삶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으로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춘 준비된 사람을 통해 역사 보아스와의 만남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준비된 사람에게, 준비된 사람을 보내주시고,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룻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준비는 말씀에 대한 결단과 생명을 건 순종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환경과 민족과 성별과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가장 완벽한 돕는 자를 예비해 주십니다. 룻의 돕는 자는 조금도 지헤와 명철과 자비가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예표하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모든 좋은 것을 지혜롭게 예비하면서 룻을 완벽하게 도와줍니다. 룻의 완벽한 도움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주의 백성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가장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허락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배려하고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품에 안고 귀히 여기시듯이, 보아스도 룻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룻을 아내로 쉽게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얻으며, 기업을 무르는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의 절차를 철저하게 따라 행합니다. 자기보다 앞선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실 때 열두 영도 더 되는 군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었으며,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절차이기에 그는 무조건 순종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말씀의 규례대로 행하기를 원했지만, 그 가까운 친족은 엘리멜렉의 찾는 재산은 원하면서도, 개취급 받는 이방여인을 책임진다거나 자손을 낳아 엘리멜렉의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책임은 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가까운 친족은 신발을 벗어줌으로 그 증거를 삼으면서 합법적인 권한을 보아스에게 이양하게 됩니다. 결국,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서 돌려주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과,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혈통을 이으며,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사겠노라고 장로들과 백성들앞에서 장로 10인을 증인으로 공적으로 약속을 하면서 룻과 혼인예식을 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신 벗어주는 자’가 되지 말라 4장 7-8절 말씀에 ‘신을 벗어주는 자’인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을 보면서 그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보다 더 육신의 근족된 그 사람은, 나오미의 손에서 밭을 사서 자신의 소유로 할 수는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 개취급을 받던 이방여인인 룻까지 사서 아내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물질은 탐이 나지만, 나머지는 택할 수 없다는 기회주의적인 처신입니다. 만약, 룻과의 혼인을 통해 그에게서 낳은 첫 아들을 말론의 이름으로 하여 그 기업까지 주고 나면, 분명히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될 것이므로, 자신이 손해 보지 않겠다는 물질적인 욕심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근족의 이러한 판단은, 단순한 물질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친족의 아픔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는 친족을 위해 그들이 감당해야 될 사명과 책임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업 무르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업 무르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당신의 백성들의 헌신과 희생과 자비를 통해 보전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족은 자기의 손해와 유익만을 계산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사명과 책임이 있음에도, 그의 단순한 욕심이 그 모든 것을 가로막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빠져버린 고장난 계산기는 자신에게 아무런 축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을 벗기운 자’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부끄러운 호칭 권리를 포기하는 의미로 엘리멜렉의 근족이 신을 벗어줍니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소유권 양도의 공식적인 증거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자초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신명기 25장9-10절을 보면 형제의 기업을 무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부르도록 칭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 규례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자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을 벗기운 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호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는 이유가 무엇인가? 탐욕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욕심때문에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이름도 달게 받겠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물질의 탐욕이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을 상실하게 만듦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오랫 동안 재물에 붙은 마음을 떼지 못해 영적으로 매우 비참해질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추해지는 사람들을 많음을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내가 땀흘려 모은 재산’이라는 생각에 철저히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형제간, 부모 자식간, 목회자와 장로들간에도 원수가 되어 싸우는 경우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형제 부모 자식간에, 교회 성도간에 소송을 벌이는 것을 보면, 물질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부끄러움은 별것도 아닌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세상의 조롱거리와 부끄러움밖에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관점이 신앙으로 잘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신앙성장에 해로운 요소가 됨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내가 피땀흘린 돈으로 교회 헌금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불행한 생각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교회에 대해서 사사로운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되고, 교회의 터주대감 노릇을 하다가, 갈등과 분쟁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의 조명아래서, 말씀순종의 바탕위에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식이 존재합니다. 늘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삶을 감당해야 하고 물질을 모아야 하지만, ‘피 땀 흘려 번 돈’이라는 의식에 앞서서,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드리며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피 땀 흘려 번 돈을 바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건강주시고, 직장주시고, 일할 환경주심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쳐 드립니다’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과 욕심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반드시 말씀앞에 불순종 부끄러움도 모르고 신을 벗은 자 처럼, 물질의 손해 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매우 절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재물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감 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물질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섬기는 신앙이 제대로 될 수 없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사람앞에 ‘신 벗기운 자’라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집착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하나니앞에서 인생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근족도 자신이 하나님의 복된 의무규례를 거부하면서까지 욕심을 내는 것들이 영원할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질부분에서 자유하고 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이 유한함과 그 유한한 자신이 가진 그 물질도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무엇입니까? 다윗 같은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나그네, 우거하는 자,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고, 잠시 살다 갈 인생이라고 합니다. 아침안개와 같아서 잠시 머무는 곳이 이 땅이라고 할 때, 인생이 재물앞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중에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질문제로 하나님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시편39:4-6에서 그림자처럼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bustle)하며 누가 취할지 모르는 재물을 쌓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20장에서는 자기자신에 대하여는 물질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에 대해서는 바보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불순종은 스스로의 존귀함의 포기 엘리멜렉의 근족이 신을 벗음으로 포기한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엘리멜렉 가문의 생명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사용해서 연약하고 가난한 생명을 살리는 자로 세워지지 못한 것입니다. 영원히 취할 수 없는 물질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맞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귀함의 포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말은 사람이 생명을 내려 놓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아기를 낳기 위해 방문을 출입할 때, 많은 여인들이 자신이 벗어 둔 신발을 유심히 보았다고 합니다.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다시 그 신을 신을 수 있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있는 사람만이 신을 신을 수 있고, 신의 용도인 걸음을 옮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신은 아버지 집에서 생명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설명합니다. 탕자가 굶어 죽을 생명의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다시 아버지의 집을 찾아와 생명의 회복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발에는 신이 다시 신기워 진 것입니다. 엘리멜렉 근족의 신 벗음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돌 볼수 있는 생명들을 포기한 것임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앞에서 생명같은 존귀함을 헌신짝 처럼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오르바와 같이 역사의 현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정말 그런 생명을 가진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도 모를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손해가 되어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되고 존귀함을 주는 것입니다. 사명의 포기는 곧 축복의 포기 엘리멜렉의 근족은 신을 벗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마땅한 사명과 의무를 포기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명의 포기는 곧 축복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음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예비된 상급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신을 벗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축복의 자리를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5장은 “신 벗어준 집”이라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복받는 일이라면, 룻이 나오미를 좇듯이 바짝 따라가야 하고, 사명과 책임앞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승리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가 요구할 때 물러서지 않고 생명바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 충성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장에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그만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면서 끝까지 따라갑니다. 결국, 영감의 갑절의 구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감의 갑절입니까? 사명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채우실 가장 놀라운 축복과 상급이 예비되어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은 오직 복이 신앙의 조건입니다.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돌 부처이든, 조로아스터교이든 상관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신에게 복이 될 듯하면 화장실 돌멩이도 섬기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참신앙은 축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사명과 순종의 삶을 구합니다. 사명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그릇위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늘 신앙은 사명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자녀삼아 교회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늘의 축복이 사명과 함께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사명앞에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은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고, 당연히 자신이 받을 축복이 있음에도, 스스로 그 축복의 권리를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작은 이익을 취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의 맛은 알지를 못합니다. 사명을 외면하는 불행한 인생의 모습일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은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가치도 없이 퇴장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의 규례대로 순종하여 모든 것을 사는 보아스 - 회복 9절과 10절에서 먼저 엘리멜렉에 가까운 친족이 자기 신을 벗어주면서 기업무를 모든 권리는 공식적으로 보아스에게 양도됩니다. 이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관점의 그 근족과는 달리 보아스는 모든 것을 공정한 절차를 따라 공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규례를 통해 일들을 진행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공식적인 재판과 귀빈의 영접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10인의 장로를 청하여 증인으로 세우면서 모든 것을 말씀대로 진행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서두름이 없이 율법의 절차를 그대로 따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이방여인 룻에 대한 행동 하나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방인 되었던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일이 비단 베들레헴의 한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의 성취의 과정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의 규례대로 순종하며, 자신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를 더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말씀대로 살아낼 때,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인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의 진정성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렵지가 않습니다. 보아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명앞에 최선의 순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말과 인격을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단순한 순종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보아스처럼 말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기쁘게 순종함으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능력보다 말씀순종이 더 중요. 예수님을 상징하는 보아스 처럼, 주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의 삶도 그와 같이 말씀앞에 순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심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복음 전하는 일에 사람의 힘을 빌리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한분이 건설하시는 나라가 아니고, 여러 사람이 동역하여 함께 건설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훌륭한 당대의 제사장, 율법학자, 헬라의 철학자들이 아닌 보잘것 없는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천한 어부들이요 죄인과 세리들이었습니다. 시몬은 사회에 아주 불만이 많은 반골기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중에는 모압 지방 출신의 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과 함께 모든 일들을 다 하셨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저들은 비록 잘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한 가지 유일하게 잘한 것이 있다면 3년간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쫓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평생을 끝까지 쫓은 사람들이 이들 제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주님닮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와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끝까지 가면서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단순한 순종의 삶을 드릴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업들은 능력 있는 ‘능력맨’을 원하지 않고, 믿을만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믿음맨’을 원한다고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보다 우선적인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지식의 종교라면, 많이 배운 사람들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씀 순종의 사람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생명을 드리는 순종을 보이심으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격과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사람은 조급하지 않음. 말씀 따라 순종하는 사람의 특징은 조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하나님은 최고의 것-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는 줄로 믿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에게 약조를 하였고, 분명히 결혼 의사를 밝혔습니다. 보아스는 성급한 마음으로 룻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심과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과 절차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취하는 분명한 자세입니다. 시편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의 길을 세가지 말합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성령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 세 번째는 ‘시절을 좇아’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씨앗을 뿌리고 내일 열매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듯이, 모든 일에는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말씀대로 행할 때, 자신의 욕심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하게 말씀의 원리와 절차를 따름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그의 계보에 나타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보아스로 상징되는, 우리 주 예수님도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모욕을 참으시며 마침내는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당신의 보혈로 값을 치루시고는 주님 당신의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 피흘림의 방법과 절차외에는 아무런 인류를 구속하시고 교회를 세우실 방법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정하신 말씀의 절차를 따라 십자가 위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요, 참된 말씀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신부의 모든 것을 사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 9절 말씀에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의 땅을 사고 또 말론의 아내 되었던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아내로 취하여 그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엘리멜렉의 후손으로 남아 있게 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서 낳은 아들이 말론의 아들이 되게 하여 엘리멜렉의 이름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저들의 기업과 생명의 회복을 이루어 내면서, 저들의 이름이 끊쳐지지 하지 않도록 완전하게 모든 것을 대신 사준 것입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원죄와 스스로 그릇 행하여 고의적으로 짓는 고범죄와 자범죄에 이르기까지, 순간 순간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으로 죄악을 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보아스가 룻을 신부로 맞이하면서 모든 것을 회복하였듯이, 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시면서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대신 속하심으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놓임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아스를 통한 은혜의 수혜자인 룻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좀 더 생각하기 원합니다. 보아스의 모든 것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행위는,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비유에서 마치 빚진 자에게 주인이 모두 탕감해 주는 경우와 같은 모습입니다. 주인이 빚진 자에게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 탕감해 준 것은 그에게 갚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완전한 파산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룻과 나오미도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기업을 회복할 힘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보아스의 은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보아스는 그 모든 것을 말씀의 규례에 순종함으로 감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보아스는 룻을 사서 신부로 맞이합니다. 본문에 보아스는 ‘룻을 샀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다’라는 단어는 '획득하다, 얻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보아스가 룻을,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룻의 모든 생명과 삶에 대한 소유권이 보아스에게로 이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영육간에 파산상태에 머물던 나오미와 룻의 모든 것을 회복된 것입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자기형편과 입장을 드러낼 수 없는 전적 무능력한 상태에서 보아스의 은혜를 입고 거듭났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생들도 보아스와 같이 기업을 회복시킬 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영육간에 파산 상태에 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이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전보다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보아스와 같이 성부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5:15)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한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아스와 룻의 결혼의 신비와 축복의 구체적인 열매를 통해 설명합니다. 마치 저 시골 산골에 사는 처녀가 왕을 만나 혼인함으로, 그의 삶의 모든 존재가 새워와 졌듯이, 주님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인생의 모든 모습도 역시 넘치는 축복과 은혜가운데 새로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관계의 회복 - 기업의 회복 - 영원한 회복복 많은 증인앞에서 행해진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그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며, 그 이름이 성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10절). 이것은 하나님 없는 곳에 존재하던 인생이 하나님앞으로 나아왔을 때, 교회가 쇠락하고 퇴락했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되었을 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의 성취이자, 기업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기업의 회복을 통해서 그 기업을 상속할 아들을 얻음으로서 그 이름이 회복되어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영원히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속량하시고 구속하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인생은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의 기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3:29 / 갈4:7).” 맺음말 결론적으로 본문은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보아스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진 은혜, 절대적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열매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보아스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희생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회복의 역사가 가능한 줄 믿습니다. 보아스의 은혜를 통해서, 비천한 이방여인으로서 스스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파산한 젊은 과부 룻에게 기업 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만 하면, 그의 초청을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앞에 항복하고 나아오기만 하면, 모든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인생기업의 회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조건과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는 아름다운 역사를 우리 자신과 이웃과 가문과 민족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꿈을 꾸리라!
설교일 : 0901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행 2:17 꿈을 꾸리라(행 2:17) -성령이 임하시면, 꿈을 모든 사람들 꿈을 꾸게 된다. -꿈을 가장 진하고 완전하게 꾼 사람들은, 그 꿈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성령이 임하시면, 꿈을 꾸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간절하고 / 사모하고 / 기대하는 / 그리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꿈을 꾸게 된다. -무엇에든지 늘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비젼이 없고/이상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복의 통로를 열지 못함. -항상,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꿈을 성령이/하나님이 지배하게 할 것이냐? 마귀가 지배하게 할 것인가? = 신앙의 선택. -좋은 생각, 하나님을 사랑하고/사모하고/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성령은 오시게 되어 있고, 꿈은 꾸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쁜 마음과 생각을 품게 되면, 사단마귀가 꿈을 지배한다. 1. 영적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깨어있는 사람 & 성전안에 머무는 사람이 꿈을 꾼다. *사무엘 & 엘리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하나님의 꿈을 보는 사람 ->주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사명에 깨어있는 사람.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 ->엘리처럼 분별없이 살지않고 영적인 문제를 분별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꿈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됨. 2. 꿈의 공간을 성령으로 채울 수 있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꿈을 잘 꾼다. *꿈을 인정하고,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꿈도 없고 꿈을 분별하지 못한다. *꿈을 두려워하지 말라.-신앙은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은 신비의 세계이다. *꿈이 없는 성도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꿈을 부인하지 말고 인정하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3. 꿈은 분별의 능력을 가질때 온전한 꿈을 꾼다. *성령이 임했을때, 생각/사상/방향이 긍정적으로 움직이게 되며, 하나님의 뜻가운데 분별한다. *하나님을 앙망 &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라. *꿈을 얻을 것이며, 꿈 가운데 열매를 보게 될 것. *결국, 기도많이 하는 분이 꿈도 꾸게 되는 것. 4. 꿈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꿈을 자신의 목표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짜 신앙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온전히 세워진다.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꿈을 주신다. *신앙이 좋아지면 꿈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5. 꿈을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필요들 1.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2. 꿈을 그려야 한다. 3. 꿈이 이루어질 때 까지 기도해야 한다. 4. 불같은 혀를 잘 사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