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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축복

설교일 : 090113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룻4:7-10


본문이 기록된 4장은 모압여인 룻의 인생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하심의 마지막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부분입니다. 한 이방 여인 룻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된 축복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금 당장 좋을 뿐, 미래의 약속이 없으면 참된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미래가 없는 사형수에게 제일 좋은 것을 마음껏 제공하는 불행한 관용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축복은 미래의 회복을 향해 나아감



룻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은 미래의 소망과 약속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지향하는 바가 뚜렷합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생명과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영원한 만족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지향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앞선 부분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문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룻은 모압으로 이민 온 이스라엘 사람 엘리멜렉 가정에 시집온 모압여인 입니다. 그의 시댁 엘리멜렉 집안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싫어서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과 함께 도망치듯 이민 온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흉년을 피해서 왔다고 단순하게 기록하지만, 실제 그들이 살던 시대가 사사시대였으며 이민의 직접적인 원인이 흉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징계라는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흉년은 국지적이지 않습니다. 저들이 살던 곳 베들레헴과 모압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님에도 이스라엘은 흉년이 들고 모압은 양식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베들레헴이란 마을의 이름 뜻은 ‘떡집’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곳에 흉년이 들어도 마지막 최후의 보루가 베들레헴은 흉년들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최악의 흉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웃한 모압나라에는 양식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흉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분명한 징계와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때에 피하지 말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앞에서는 꼼짝달싹하지 말고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피한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며 결코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앞에서 도망가는 순간 완전한 절망밖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실제로 엘리멜렉이 집안이 그 표준이 됩니다. 엘리멜렉 자신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젊어서 자식도 없이 죽어버리고, 이제는 두 이방 여인 며느리만 남게 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철저하게 망하면서 손가락질 받기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 나오미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의 징계가운데 들 때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나아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서 피할 방도를 구하지만, 도리가 없음을 봅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해법을 찾겠다고 나서는 만큼 더 세상앞에서 손가락질 받고 더 완벽하게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맞는 말이면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거나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형의 교회는 영원할지 몰라도, 지상교회를 완전하게 보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가르침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붙어있지 아니하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을 알 때, 함부로 교회안에서 자기 목소리로 떠들지를 않게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앞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르고, 교회를 어머니의 품과 같이 기쁘게 대할 때, 영원한 생명력이 교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싹’을 잘라놓으시는 분이십니다. 1장에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땅을 떠날 때, 자식을 둘 수 도 없고, 둔다고 한들 ‘소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룻1:11-12). 이것은 계대결혼을 염두고 두고 한 말입니다. 계대결혼 시킬 자식하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택한 백성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인간적인 제도와 수단과 통용되는 모든 방법까지 아예 ‘싹’을 잘라놓고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타락하여 하나님 앞을 떠났을 때, 하나님앞에 두 손 두 발들고 나아오는 것 외에는 교회의 회복을 위한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머무는 자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



반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집에 머무는 자, 당신의 음성에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의 삶은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오미의 집안과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심판의 수단으로 국지적일 수 없는 흉년을 사용하여서 심판하시듯, 하나님은 구약의 가정교회인 이삭의 집안을 축복하시는 방편으로도 흉년을 사용하신 예가 있습니다.


이삭의 가정 교회는 순종과 형통의 모범이 되는 교회입니다. 이삭은 전공이 농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순종과 그 결과를 보면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 이후 이삭의 별명은 하나님앞에서 형통과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그 이삭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주변은 다 흉년들었음에도 유독 이삭의 가정은 백배의 결실을 맺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모두가 흉년들고 어려워도 당신에게 꼭 붙어있는 당신의 교회와 백성들 만큼은 풍년의 축복을 허락하실 수 있는 분이시면서, 또한 반대로 모압과 같이 가까운 이웃 나라가 풍년이 들어도 징계 아래 흉년으로 끝장을 보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 뿐 아니라, 축복과 심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인생은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당장 심판과 징계의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의 교회를 붙들고 늘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축복받는 교회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사나 죽으나 주님 앞에 꼭 붙어있는 교회가 결국에는 세상이 다 망한다 해도 승리하고 이기는 권세를 얻는 것입니다.



회복의 시작은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



영육간에 실패하고 초라해진 늙은 시모 나오미에게 유대땅에 양식있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집나간 자녀와 타락한 교회를 세우고자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 복음인 것입니다. 이에 늙은 나오미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몸을 돌이킵니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이 희락과 기쁨임에 반해, 스스로의 이름을 ‘마라’로 부를 정도로 쓴 맛이 나는 괴로운 인생의 형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어떤 위로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이켰을 때에, 10년 만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맞이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그가 어느 정도 유력한 집안이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오미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마라’라는 쓴 맛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미 마음이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으로 초라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는 순간 회복의 역사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임을 아는 두 자부에게 돌아가기를 권합니다. 나오미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기에, 두 며느리는 살길을 가도록 합니다. 결국, 동서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에게 받았던 말씀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하면서 나오미의 치맛자락을 바짝 붙잡고 굳게 결심함으로 어머니를 좇아갑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완전히 알거나 이해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인 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조금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배웠던 것입니다. 룻은 희미해 보이지만, 바로 영혼을 살리는 그 부스러기 같은 말씀을 붙들었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인 어머니를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분명한 회복의 길



룻이 가보지 않은 베들레헴을 갈 이유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인 어머니가 들려준 말씀이 좋고, 그 교회가 말씀을 따라 살려는 것을 볼 때,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 안에서 갈길을 밝히 보여준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좋은 것이라고 믿고 결정해서 가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는 정도가 아니고, 자신도 거기에 생명을 걸고 니오미처럼 좇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으며, 예비된 하나님의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작은 앎일지라도 결단하고 결심하고 단 마음으로 순종하며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단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자비하심의 은혜와 축복의 문이 서서히 열려지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단의 돌이키는 마음과 순종의 팔다리를 움직임으로 하늘 문이 비로소 열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사역가운데, 연말이 되면 신년부터는 사역을 멈추겠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교사로 가르쳐 보니까, 찬양단으로 봉사해 보니까,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아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좀 더 배운 뒤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것을 깨우치고 안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겠다는 것은 교만일 따름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작정하는 순간 실제 하나님의 무궁한 능력은 그 사람의 지식에 갇혀 버리고 제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식이 부족하고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교회가 원한다고 할 때 겸손히 순종하는 삶의 자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룻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룻에게 교회인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고 들은 말씀을 따라, 거기에 생명을 걸었을 때에 상상치 못한 기적같은 일들이 룻앞에 예비되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잘 몰라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앞에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를 마음껏 받아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모든 좋은 것이 존재함



이스라엘 베들레헴 땅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마라’라 스스로 칭하는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의 통치하시고 다스림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하나님이 구체적인 도와주심과 예비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어머니를 열심히 따르고, 봉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이 예비한 보아스를 만나도록 하십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로서 베들레헴의 유력자입니다. 그들의 잃어버린 재산을 찾아주며, 장래에 모압 여인 룻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아서 엘레멜렉 집안을 잇도록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겨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주님이 허락하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인격안에서 만나게 될 때, 우리 삶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으로 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춘 준비된 사람을 통해 역사



보아스와의 만남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준비된 사람에게, 준비된 사람을 보내주시고,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룻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준비는 말씀에 대한 결단과 생명을 건 순종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환경과 민족과 성별과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가장 완벽한 돕는 자를 예비해 주십니다. 룻의 돕는 자는 조금도 지헤와 명철과 자비가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예표하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모든 좋은 것을 지혜롭게 예비하면서 룻을 완벽하게 도와줍니다. 룻의 완벽한 도움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을 찾는 주의 백성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가장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허락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배려하고 희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품에 안고 귀히 여기시듯이, 보아스도 룻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룻을 아내로 쉽게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얻으며, 기업을 무르는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의 절차를 철저하게 따라 행합니다. 자기보다 앞선 친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실 때 열두 영도 더 되는 군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었으며,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절차이기에 그는 무조건 순종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말씀의 규례대로 행하기를 원했지만, 그 가까운 친족은 엘리멜렉의 찾는 재산은 원하면서도, 개취급 받는 이방여인을 책임진다거나 자손을 낳아 엘리멜렉의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책임은 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가까운 친족은 신발을 벗어줌으로 그 증거를 삼으면서 합법적인 권한을 보아스에게 이양하게 됩니다. 결국,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서 돌려주는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과,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혈통을 이으며,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사겠노라고 장로들과 백성들앞에서 장로 10인을 증인으로 공적으로 약속을 하면서 룻과 혼인예식을 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신 벗어주는 자’가 되지 말라



4장 7-8절 말씀에 ‘신을 벗어주는 자’인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을 보면서 그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보다 더 육신의 근족된 그 사람은, 나오미의 손에서 밭을 사서 자신의 소유로 할 수는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 개취급을 받던 이방여인인 룻까지 사서 아내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물질은 탐이 나지만, 나머지는 택할 수 없다는 기회주의적인 처신입니다. 만약, 룻과의 혼인을 통해 그에게서 낳은 첫 아들을 말론의 이름으로 하여 그 기업까지 주고 나면, 분명히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될 것이므로, 자신이 손해 보지 않겠다는 물질적인 욕심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근족의 이러한 판단은, 단순한 물질적인 이해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친족의 아픔을 감당하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는 친족을 위해 그들이 감당해야 될 사명과 책임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업 무르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업 무르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당신의 백성들의 헌신과 희생과 자비를 통해 보전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족은 자기의 손해와 유익만을 계산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사명과 책임이 있음에도, 그의 단순한 욕심이 그 모든 것을 가로막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빠져버린 고장난 계산기는 자신에게 아무런 축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을 벗기운 자’라는 이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부끄러운 호칭



권리를 포기하는 의미로 엘리멜렉의 근족이 신을 벗어줍니다. 신을 벗는 다는 것은, 소유권 양도의 공식적인 증거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자초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신명기 25장9-10절을 보면 형제의 기업을 무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부르도록 칭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령 규례에 대해서 불순종하는 자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을 벗기운 자’라는 이름은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호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는 이유가 무엇인가? 탐욕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욕심때문에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이름도 달게 받겠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물질의 탐욕이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을 상실하게 만듦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오랫 동안 재물에 붙은 마음을 떼지 못해 영적으로 매우 비참해질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추해지는 사람들을 많음을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내가 땀흘려 모은 재산’이라는 생각에 철저히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형제간, 부모 자식간, 목회자와 장로들간에도 원수가 되어 싸우는 경우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형제 부모 자식간에, 교회 성도간에 소송을 벌이는 것을 보면, 물질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부끄러움은 별것도 아닌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세상의 조롱거리와 부끄러움밖에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관점이 신앙으로 잘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신앙성장에 해로운 요소가 됨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내가 피땀흘린 돈으로 교회 헌금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불행한 생각이 신앙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교회에 대해서 사사로운 주인 의식을 가지게 되고, 교회의 터주대감 노릇을 하다가, 갈등과 분쟁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의 조명아래서, 말씀순종의 바탕위에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식이 존재합니다. 늘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삶을 감당해야 하고 물질을 모아야 하지만, ‘피 땀 흘려 번 돈’이라는 의식에 앞서서,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드리며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즉, ‘피 땀 흘려 번 돈을 바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건강주시고, 직장주시고, 일할 환경주심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쳐 드립니다’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과 욕심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반드시 말씀앞에 불순종



부끄러움도 모르고 신을 벗은 자 처럼, 물질의 손해 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매우 절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재물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감 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물질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섬기는 신앙이 제대로 될 수 없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사람앞에 ‘신 벗기운 자’라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집착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하나니앞에서 인생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근족도 자신이 하나님의 복된 의무규례를 거부하면서까지 욕심을 내는 것들이 영원할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질부분에서 자유하고 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이 유한함과 그 유한한 자신이 가진 그 물질도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무엇입니까? 다윗 같은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나그네, 우거하는 자,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고, 잠시 살다 갈 인생이라고 합니다. 아침안개와 같아서 잠시 머무는 곳이 이 땅이라고 할 때, 인생이 재물앞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중에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질문제로 하나님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시편39:4-6에서 그림자처럼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bustle)하며 누가 취할지 모르는 재물을 쌓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20장에서는 자기자신에 대하여는 물질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에 대해서는 바보요,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불순종은 스스로의 존귀함의 포기



엘리멜렉의 근족이 신을 벗음으로 포기한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엘리멜렉 가문의 생명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사용해서 연약하고 가난한 생명을 살리는 자로 세워지지 못한 것입니다. 영원히 취할 수 없는 물질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맞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귀함의 포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말은 사람이 생명을 내려 놓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아기를 낳기 위해 방문을 출입할 때, 많은 여인들이 자신이 벗어 둔 신발을 유심히 보았다고 합니다.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고 다시 그 신을 신을 수 있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있는 사람만이 신을 신을 수 있고, 신의 용도인 걸음을 옮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신은 아버지 집에서 생명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설명합니다. 탕자가 굶어 죽을 생명의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다시 아버지의 집을 찾아와 생명의 회복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발에는 신이 다시 신기워 진 것입니다.


엘리멜렉 근족의 신 벗음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돌 볼수 있는 생명들을 포기한 것임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앞에서 생명같은 존귀함을 헌신짝 처럼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오르바와 같이 역사의 현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정말 그런 생명을 가진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도 모를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례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손해가 되어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되고 존귀함을 주는 것입니다.



사명의 포기는 곧 축복의 포기



엘리멜렉의 근족은 신을 벗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마땅한 사명과 의무를 포기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명의 포기는 곧 축복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음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예비된 상급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신을 벗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축복의 자리를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5장은 “신 벗어준 집”이라 규정하며 공개적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복받는 일이라면, 룻이 나오미를 좇듯이 바짝 따라가야 하고, 사명과 책임앞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승리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가 요구할 때 물러서지 않고 생명바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해 충성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2장에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그만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면서 끝까지 따라갑니다. 결국, 영감의 갑절의 구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감의 갑절입니까? 사명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명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채우실 가장 놀라운 축복과 상급이 예비되어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은 오직 복이 신앙의 조건입니다.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돌 부처이든, 조로아스터교이든 상관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신에게 복이 될 듯하면 화장실 돌멩이도 섬기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참신앙은 축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사명과 순종의 삶을 구합니다. 사명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그릇위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늘 신앙은 사명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자녀삼아 교회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늘의 축복이 사명과 함께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사명앞에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은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고, 당연히 자신이 받을 축복이 있음에도, 스스로 그 축복의 권리를 포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작은 이익을 취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의 맛은 알지를 못합니다. 사명을 외면하는 불행한 인생의 모습일 따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은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가치도 없이 퇴장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의 규례대로 순종하여 모든 것을 사는 보아스 - 회복



9절과 10절에서 먼저 엘리멜렉에 가까운 친족이 자기 신을 벗어주면서 기업무를 모든 권리는 공식적으로 보아스에게 양도됩니다. 이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관점의 그 근족과는 달리 보아스는 모든 것을 공정한 절차를 따라 공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규례를 통해 일들을 진행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공식적인 재판과 귀빈의 영접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10인의 장로를 청하여 증인으로 세우면서 모든 것을 말씀대로 진행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서두름이 없이 율법의 절차를 그대로 따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이방여인 룻에 대한 행동 하나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방인 되었던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일이 비단 베들레헴의 한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의 성취의 과정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의 규례대로 순종하며, 자신의 형편보다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를 더 생각하며 충성스럽게 말씀대로 살아낼 때,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인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의 진정성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렵지가 않습니다. 보아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명앞에 최선의 순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말과 인격을 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단순한 순종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보아스처럼 말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기쁘게 순종함으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능력보다 말씀순종이 더 중요.



예수님을 상징하는 보아스 처럼, 주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의 삶도 그와 같이 말씀앞에 순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심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복음 전하는 일에 사람의 힘을 빌리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한분이 건설하시는 나라가 아니고, 여러 사람이 동역하여 함께 건설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훌륭한 당대의 제사장, 율법학자, 헬라의 철학자들이 아닌 보잘것 없는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천한 어부들이요 죄인과 세리들이었습니다. 시몬은 사회에 아주 불만이 많은 반골기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중에는 모압 지방 출신의 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과 함께 모든 일들을 다 하셨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저들은 비록 잘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한 가지 유일하게 잘한 것이 있다면 3년간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쫓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평생을 끝까지 쫓은 사람들이 이들 제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주님닮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와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끝까지 가면서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단순한 순종의 삶을 드릴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업들은 능력 있는 ‘능력맨’을 원하지 않고, 믿을만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믿음맨’을 원한다고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보다 우선적인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지식의 종교라면, 많이 배운 사람들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씀 순종의 사람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생명을 드리는 순종을 보이심으로,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격과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사람은 조급하지 않음.



말씀 따라 순종하는 사람의 특징은 조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하나님은 최고의 것-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는 줄로 믿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에게 약조를 하였고, 분명히 결혼 의사를 밝혔습니다. 보아스는 성급한 마음으로 룻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심과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법과 절차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취하는 분명한 자세입니다.


시편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의 길을 세가지 말합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성령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 세 번째는 ‘시절을 좇아’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씨앗을 뿌리고 내일 열매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듯이, 모든 일에는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말씀대로 행할 때, 자신의 욕심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철저하게 말씀의 원리와 절차를 따름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그의 계보에 나타나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보아스로 상징되는, 우리 주 예수님도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모욕을 참으시며 마침내는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당신의 보혈로 값을 치루시고는 주님 당신의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 피흘림의 방법과 절차외에는 아무런 인류를 구속하시고 교회를 세우실 방법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정하신 말씀의 절차를 따라 십자가 위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요, 참된 말씀의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신부의 모든 것을 사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



9절 말씀에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의 땅을 사고 또 말론의 아내 되었던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아내로 취하여 그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엘리멜렉의 후손으로 남아 있게 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서 낳은 아들이 말론의 아들이 되게 하여 엘리멜렉의 이름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저들의 기업과 생명의 회복을 이루어 내면서, 저들의 이름이 끊쳐지지 하지 않도록 완전하게 모든 것을 대신 사준 것입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원죄와 스스로 그릇 행하여 고의적으로 짓는 고범죄와 자범죄에 이르기까지, 순간 순간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으로 죄악을 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보아스가 룻을 신부로 맞이하면서 모든 것을 회복하였듯이, 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시면서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대신 속하심으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놓임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아스를 통한 은혜의 수혜자인 룻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좀 더 생각하기 원합니다. 보아스의 모든 것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행위는,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비유에서 마치 빚진 자에게 주인이 모두 탕감해 주는 경우와 같은 모습입니다. 주인이 빚진 자에게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 탕감해 준 것은 그에게 갚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완전한 파산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룻과 나오미도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기업을 회복할 힘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보아스의 은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보아스는 그 모든 것을 말씀의 규례에 순종함으로 감당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보아스는 룻을 사서 신부로 맞이합니다. 본문에 보아스는 ‘룻을 샀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다’라는 단어는 '획득하다, 얻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보아스가 룻을, 대가를 지불하고 획득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룻의 모든 생명과 삶에 대한 소유권이 보아스에게로 이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영육간에 파산상태에 머물던 나오미와 룻의 모든 것을 회복된 것입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자기형편과 입장을 드러낼 수 없는 전적 무능력한 상태에서 보아스의 은혜를 입고 거듭났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생들도 보아스와 같이 기업을 회복시킬 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영육간에 파산 상태에 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이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전보다 넘치는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보아스와 같이 성부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5:15)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한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아스와 룻의 결혼의 신비와 축복의 구체적인 열매를 통해 설명합니다. 마치 저 시골 산골에 사는 처녀가 왕을 만나 혼인함으로, 그의 삶의 모든 존재가 새워와 졌듯이, 주님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인생의 모든 모습도 역시 넘치는 축복과 은혜가운데 새로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관계의 회복 - 기업의 회복 - 영원한 회복복


많은 증인앞에서 행해진 보아스와 룻의 결혼은 그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며, 그 이름이 성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10절). 이것은 하나님 없는 곳에 존재하던 인생이 하나님앞으로 나아왔을 때, 교회가 쇠락하고 퇴락했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되었을 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의 성취이자, 기업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기업의 회복을 통해서 그 기업을 상속할 아들을 얻음으로서 그 이름이 회복되어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영원히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가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속량하시고 구속하신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인생은 그리스도안에서 ‘천국의 기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3:29 / 갈4:7).”

맺음말


결론적으로 본문은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보아스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진 은혜, 절대적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열매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보아스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희생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회복의 역사가 가능한 줄 믿습니다.


보아스의 은혜를 통해서, 비천한 이방여인으로서 스스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파산한 젊은 과부 룻에게 기업 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만 하면, 그의 초청을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앞에 항복하고 나아오기만 하면, 모든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인생기업의 회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조건과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는 아름다운 역사를 우리 자신과 이웃과 가문과 민족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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