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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n(요1:9-14)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는 어느 복음서일까요?”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후에 기록될수록 문장도 세련되고, 등장하는 용어들도 다양합니다. 그 때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고,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가 사용했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했던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도 이미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역 (Septuagint)’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벌써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들의 2세들과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을 완성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2명의 권위있는 유대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대표 학자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모두 72명의 학자들이 번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과감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빼고, 이렇게 그의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4) 여기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로고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로고스’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로고스’ 사상을 잠시 빌려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정작 요한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14절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로스’ 사상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번역합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이거 재미있는데?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그들은 생소하게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이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셔서 우리들 가운데 사셨다”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incarnare’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in’은 ‘into’를 말하고, 뒤에 나오는 ‘caro’는 ‘육체 (flesh)’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태어나셨다 (to make flesh)’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집을 지으신 (made his home among us)’ 것입니다. 이 말씀이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with us (말씀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재미있는 번역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그가 번역한 The Message에서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blood, and moved into the neighborhood (말씀이 몸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셨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 (He was full of unfailing love and faithfulness).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개의 사인 (sings)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가나 (Cana)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1) 이 말씀에 나오는 ‘그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영광을 이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 (sign)’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보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다 (And Christ became a human being and lived here on earth among us, Living Bible)”는 ‘인카네이션’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주는 교훈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겸손 (humility)입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도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 더 좋은 대우, 더 좋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전 아닙니다. 전 성공적인 삶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씀에서도 어떻게 하면 정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성경적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아, 예, 그럼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하면서 굽실거리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가 말한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제일 낮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고이는 것처럼, 겸손이란 제일 낮은 곳을 찾아가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성공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내 속에 영광을 채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공입니다.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 Netherlands)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 신학대학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정말 잘 나가는 교수였습니다. 아무 일 없이 보장된 삶을 살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질문은 “지금의 내 삶이 내가 살아야 하는 최선의 삶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삶이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L’Arche Daybreak)’라는 장애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는 하바드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바드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던 것들을 장애인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죽은 후에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서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을 이용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Nouwen Society’에 속한 사람들은 나우엔이 보여준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downward mobility (하향 이동성)’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성)’의 삶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사회적인 지위나 조건을 더 높은 레벨로 끌어 올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downward mobility’의 삶은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사회적인 레벨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갈까 에 초점을 맞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 놓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내려놓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이 그랬습니다. ‘upward mobility’의 삶을 내려 놓고, ‘downward mobility]의 삶을 선택했더니, 그가 죽고 나서 ‘Henri Nouwen Society’가 생겼습니다. 나우엔의 삶을 흠모하고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우엔이 ‘L’Arche Daybreak’에서 경험했고 발견했던 것들을 책으로 펴 냈는데, 그가 쓴 책마다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모두 39권의 책을 썼는데요. 모두 800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책이 28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인카네이션’의 삶은 겸손과 내려 놓음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공을 지향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는지, 어느 삶을 내가 선택할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번 밖에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1-12절) 이 말씀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qualification)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o believe and to accept Him (그를 믿고 받아들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생활이 되고, 믿음생활에 변화가 없고, 믿음생활에 능력이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全人的)인 결단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감정적인, 의지적인 결단을 말합니다. ‘holistic commitment’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의 전인적인 commitment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구원을 선포했고, 또 그런 설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오늘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교회가 출현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holistic commitment’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 곧 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같은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카네이션’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upward mobility (상향 이동식)’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downward mobility (하향이동식)’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나를 간절히 찾는 자는 나를 만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7(Jan.28 2015) (대하16:1-14)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자!) 아사왕 제 36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북이스라엘왕 바아사가 남 유다를 치려 올라와 예루살렘 가까운 라마에 성을 건축하려 했다. 주 목적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아사왕에게 빼앗겨 남 유다로 망명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자 아사왕은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아람왕 벤하닷에게 보내 조약을 맺었다.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맺은 조약을 파괴시켜, 아람이 남유다를 돕게 한 것이다. 은금이 탐이 난 벤하닷이 아사왕의 말을 듣고 군대 지휘관을 보내 북이스라엘 성읍들, 곧 이욘, 단, 아벨마임, 납달리까지 모든 국고성을 집중 공격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는 라마를 건축하던 일을 포기했다. 바아사가 성 건축 공사를 중단하자 아사왕은 라마를 건축하던 자재를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다. 아사왕의 계획이 완전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사왕의 안타까운 실수가 있다. 선지자 하나니가 아사왕의 잘못을 이렇게 지적했다. 7-9절이다. [7]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한 마디로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의 도움으로 북이스라엘의 침공 문제를 해결한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 이사왕이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아사왕은 구스의 백만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도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물리치고 승리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라고 아사왕은 전폭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로 승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과 비교해서 얼마 안 되는 적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했을까?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가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까? 또한 12절에 보면 아사가 왕 제 삼십구년에 발에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했다고 한다. 이것 때문에 7절의 선지자의 경고대로 아람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나고, 9절의 말씀대로 많은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오래 동안 지속되었던 평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병이 들어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 결국 그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왜 이렇게 안타깝게 되었을까? 왜 적은 수의 적이 침공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서 나라에 평화가 사라지고,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서 죽고 말았을까? 안타깝게도 이것은 아사왕의 믿음의 한계다. 정말 절박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지만, 평화가 오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 가능해 보이는 별로 심각하지 않는 문제가 닥쳤을 때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9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여기에서 ‘전심’으로란 어떤 문제를 만나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적당히 내 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 아사 왕만 아니다. 많은 성도들이 같은 실수를 한다. 백만 대군 같이 자기 힘으로 도무지 할 수 없는 적이나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한다. 그런데 그렇게 심각하지 않는 문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 가능해 보이는 사소한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흔히 심각한 문제를 만나면 새벽 기도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중단해버린다.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평생 매일 새벽을 깨우자. 그렇게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자. 쉬운 일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 쉬워 보이는 문제나 어려운 문제, 급박한 일이나 여유가 있는 일, 성도는 어떤 일을 만나든 전폭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아사왕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화는 내고 그 말을 한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아사왕은 하나님의 책망 앞에 자신의 행동이 죄였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합리화) 이것은 교만 , 고집(완고함)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과 멀어진다. 하나님의 보호, 은혜, 사랑, 건강주심, 평화, 축복, 친밀 교제에서 멀어진다. 결론 : 크고 작음에 상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렇게 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책망, 징계, 환난이 생기면 겸손하게 회개하자.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2015년 부활절 연합새벽예배(뉴욕 제 3지역) 일시 2015년 4월 5일 주일 오전 6시 장소 뉴욕서광교회(최고센목사) 37-05 54th St. Woodside, NY 11377 사회 예사랑교회 손한권목사 기도 뉴욕동부교회 유웅진목사 설교 뉴욕서광교회 최고센목사 헌금기도 윤영환목사 축도 신성능목사 22년만에 뉴욕 부활절 연합새벽기도회가 우리교회에서 열리게 되었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부활절연합새벽기도회에 처음으로 참석하였고 또한 설교를 맡아 막16:1-11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안식후 첫날 매우 일찍"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동하였습니다 부활과 구원 부활과 회복 참의미 있는 말씀으로 막달라마리아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여인의 신앙의 자세에 대한 말씀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시고 네일은 안식일이라 십자게에 메달라 둘 수 없어 죽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것을 보았으며 세마포에 싸아 아미마대 요셉의 무덤에 매장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장이라기 보다는 무덤에 가두었다고 보는 것이 옮겠지요 왜냐하면 돌무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죽은 시체를 무덤에 넣고는 큰 돌을 굴려 무덤을 인봉하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였을 때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물과 피가 쏟아지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운명하시면서 고개가 떨구어졌을 때 하늘이 캄캄하여지더니 완전히 어두어지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이처럼 에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완전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막달라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였습니다 귀한 형품과 기름을 준히하였던 것입니다 이유는 내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살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면서 안식일이 지난 후에 예수님 무덤에 가서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덤에 있는 예수님 몸에 바르며 장례를 치루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주일성수를 처음으로 지킨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일성수는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되어있으며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이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개혁적인 신앙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서는 안식일이었다면 그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의 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며 신약은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라면 신약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 신약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입니다 그림자와 실체는 짝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며 또한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따로 있는 책이지만 그러나 한 권이며 똑같은 말씀인데 하나는 그림자이며 하나는 실체의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권이며 곧 예수님에 관한 스토리이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자들이 수십명이지만 그들은 말씀을 기록하는데 성령의 쓰임을 받은 사람일 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도 다윗도 사도바울과 사도요한도 모두가 성령의 강권에 쓰임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막달라마리아는 주일을 우리에게 증거한 여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주님의 빈무덤과 같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지금 이곳은 예수님을 중심가운데 영접한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요 장소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믿음과 주님을 만나러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를 만나러나오는 것이지만 "당신을 보니 예수님을 보는듯합니다"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정말 주님을 만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벽을 깨우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 아니 주일성수한 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그분에게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허공에다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출애굽 말씀을 보면 새벽에 광야에 나가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려면 새벽을 깨우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가 떴을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광야에 뿌려주신 만나가 시들어 버려서 거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에 나가야 합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살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광야로 새벽에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말씀이라면 신약에서는 예수님도 새벽미명에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막달라마리아처럼 새벽에 교회에 달려와야 합니다 말달라마리아는 그 손에 준비한 예물이 들려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향품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정성으로 준비한 예물이 필요합니다 정성이라는 말음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준비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있고 예배에는 예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산술적으로 말할 때 십분의 일이지만 그 의미로는 온전한 완전하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두렙돈을 드린 과부가 칭찬받은 것은 많아서가 아닙니다 적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 완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부자는 두렙돈보다 훨씬 많이 드렸을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드린 예물이 온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달라마리아의 손에 들린 예물은 그의 신앙이며 그의 마음이며 그녀의 정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구약에서는 법으로 십일조가 정해졌다면 신약에서 믿음의 십일조가 드려진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막달라마리아처럼 신앙하시는 여러분되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체일 처음 만난 사람은 12제자가 아닙니다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막달라마리아는 원래 일곱귀신이 들려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 귀신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의 연구논문을 빌리면 이여인이 세상을 열심히 살았던 여인이랍니다 성경에도 보면 이 여인이 마귀를 물리치고 난 다음 예수님을 섬길 때 자기의 소유로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세상에서 돈많이 벌고자 세상에 완전히 잡혀 있었던 여인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잡혀 있는 것을 마귀에게 잡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왕은 사탄이며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돈벌려고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사람들 혹은 돈을 먹고자 일을 더 많이 하고자 애쓰는 사람들 이들은 다 세상에 완전히 붙잡힌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막달라마리아가 일곱귀신 들려 있다고 하니까 미친여자처럼 정신이상처럼 생각하기 쉽숩니다 하지만 굉장히 지적인 여인이었다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가 많았다는 것은 그많큰 물질이 많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돈을 멀고 일을 하는 것에 열심을 다하였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물에 드림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막달라마리아와 같은 미리 준비하여 하나님을 것을 구별하여 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시는 성도여러분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던 때 성도들은 머리 맡에 내일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두고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교회와서 부랴부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였다가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하나님것을 구별한다는 것과 구별한 것을 준비하여 드린다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기에 주님이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은 사명을 받습니다 두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그 하나는 내가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라는 사명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만났다고 하는 감동과 감격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그는 제자들에게 전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여인들이 되었습니다 감격입니다 감동입니다 전도는 기술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이지요 은혜의 감격과 감동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닙니다 전도는 기술이 아닙니다 전도는 방법이 아니라 감동 감격이며 경험과 체험입니다 나의 신앙의 고백이라는 것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며 향품을 준비하여 새벽을 깨우며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파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이 오늘 새벽을 깨우신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 연단(청년부)
연단(Refine)은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순한 금속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마다 열방을 통해 치시고, 그들의 손에 붙이신 것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연단 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사야 48:10에 보면 “내가 너희를 단련(연단)시켰으나, 은을 정련하듯 하지 않고 오히려 너희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단련시켰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게 하고, 다시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돌려 보내신 것을 두고 “너희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단련(연단) 시켰다”고 하신 것이다. 은을 정련하듯 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연단에 대한 성경 말씀들 히브리서 12:7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 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로마서 5:3-5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6-17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이 겪으신 고난에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3-4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명하여 가로되 너희의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중 삼분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삼분 일은 수르문에 있고 삼분 일은 호위대 뒤에 있는 문에 있어서 이와 같이 왕궁을 주의하여 지켜 방어하고 안식일에 출번하는 너희 중 두 대는 여호와의 전을 주의하여 지켜 왕을 호위하되 너희는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며 무릇 너희 반열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할찌니라 백부장들이 이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대로 행하여 각기 관할하는바 안식일에 입번할 자와 출번할 자를 거느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나아오매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니 호위병이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되 전 우편에서부터 전 좌편까지 단과 전 곁에 서고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아달랴가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백성에게 이르러 보매 왕이 규례대로 대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셨으며 온 국민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무릇 저를 따르는 자는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이에 저의 길을 열어주매 저가 왕궁 말 다니는 길로 통과하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또 백부장들과 가리 사람과 호위병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호위병의 문 길로 말미암아 왕궁에 이르매 저가 왕의 보좌에 앉으니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왕하 11:1-20)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있습니다. 만사(萬事)는 반드시 바른 이치(正理)로 돌아간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삶의 표현들은 사실상 역사를 공의롭게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등불이었던 다윗의 정통 가문의 맥을 끊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마 1:1)를 도전한 아달랴를 보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명을 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간 거룩한하나님의 왕명을 따라 목숨을 걸고 왕도를 걸었던 여호세바도 보려고 합니다. Ⅰ.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한 아달랴 열왕기하 11장 1절에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달랴는 북조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남조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가 된 자였습니다. 그가 남조 유다의왕가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은 남조의 4대 왕 여호사밧의 정략적 결혼 정책 때문이었습니다(대하 18:1). 그래서 아합과 여호사밧은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녀 때문에 남편 여호람은 북조 이스라엘의 우상 바알 숭배를 도입하게 되고(왕하 8:18),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그 부왕의우상 숭배 사상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대하 22:3). 그녀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시야는 병중에 있던 북조 왕 요람을 방문하러 갔다가(왕하 8:29), 예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하 9:27). 남조 유다 왕 아하시야가 죽었을 때 왕의 어머니였던 아달랴는 그 왕실의 약한 틈을 타서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의 씨’란 왕위를 계승할 적통 왕자들을 가리킴인데, 말하자면 그녀의 친손자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권력에 눈이어두워져 왕위 찬탈을 위하여 자신의 친손자들까지 비정하게 떼죽음을 시켜 버렸습니다. 그녀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혈관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우상 숭배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왕하8:18, 25-26). 그녀는 남조 유다로 시집오자마자 그 아버지 어머니가 섬기던 우상 종교를 펴는 데 전력을 기울였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권력을 잡고 6년 세월 동안 전(全)남조 유다에 우상 숭배적 폭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왕손 진멸의 소행’은 단순한 정권 찬탈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다윗의 왕통을 진멸하고자 하는 무서운 사탄적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경륜 속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적통 왕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려고 계획했던것입니다. 그녀는 사탄의 책동을 힘입고, 다윗 왕손들의 적자를 진멸함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모화 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하시야의 왕자들이 그녀에게 떼죽임을 당하는 것은, 역사 중에 일어난 단순한 정권 찬탈의 희생 제물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가를 향한 아달랴의 반역은 단순한 정치적 악순환에 그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계사의 중심은 인간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통하여 주도해 나가시는 구속사가 그 중심이라고 생각할 때, 아달랴의 반역과 아하시야 왕손의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의 맥을 절단시키는 반신(反神)적이요 배약적, 배도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Ⅱ. 왕명에 산 여호세바 열왕기하 11장 2절에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호세바’라고 하는 여자는 바로 죽은 아하시야 왕의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람 왕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남조 5대 임금여호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습니다(대하 22:11). 그렇다면 친 왕손을 멸하고자 하는 아달랴는 바로 여호세바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아달랴가 왕자들을 떼죽음시키는 무서운 학정 가운데서 갓난 왕자 요아스를 도적해 내어, 6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에서 숨겨 키웠습니다. 그동안 아달랴의 우상 폭정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왕하 11:3). 여호세바는 이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제사장인 자기 남편과 함께 그 왕자 요아스를 살려 내는 데 존재적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왜 그러했을까 그것은 왕명에 대한 신앙과 충성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왕자 요아스를 구출함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아니면 의분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요 충성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의 왕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 16절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열왕기하 8장 19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삼하 7:12-17). 열왕기상 11장 36절에도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윗에게 약속한 ‘한 등불’, 항상 하나님 앞에 있게 한 등불이 무엇인가 이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왕손들이 끊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을 다스릴 사실을 예언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오실 메시아 예수에게까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입니다. 그렇다면 아달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등불, 예루살렘의 등불을 끄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세바는 하나님이 다윗의 왕가에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등불, 예루살렘의 등불을 끄지 못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윗 왕가를 향한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실행에 충성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명에 자기 삶의 존재 의미를불태웠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때, 그 장소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자기 존재 의미와 목적을 바로 깨달았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출입하며 섬기는 그 하나님의 성전을 왕손 구원의 방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등불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 언약 성취에 신실하신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실로 왕명에 살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눈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렇게도 엄청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Ⅲ. 왕도를 행하는 백성들(왕하 11:4-21)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말았습니다. 아달랴의 학정이 6년이 지날 때였습니다. 그동안 어린 요아스 왕자는 성전에서숨겨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달랴 집권 제7년에 요아스를 다시 유다의 왕으로 모시는 새 역사의 장(章)이 열렸습니다. 여호세바의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물샐 틈 없는 계획을 따라, 여호와 전에 살아남아 있는 다윗 왕가의 적손 요아스를백성 앞에 보였습니다(왕하 11:4). 그리고 단과 전 곁으로 왕자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불렀습니다(왕하 11:11-12). 그리고 제사장의 지휘를 받은 군인들은 도망가던 아달랴를 칼로 죽였습니다(왕하 11:13-16, 20). 제사장 여호야다는 이스라엘의 적통 왕자로 하여금 거룩한 다윗의 전통을 잇도록 만드는 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충성은 바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왕하 8:19)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여호와의 거사에 기용을 당한 백부장들의 이름을 남겼는데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이라고 하였습니다(대하 23:1). 저들은 모두 그 시대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왕명을 좇아 왕도를 걷던 사람들이었습니다. 7세에 다윗의 위를 계승한 요아스는 3대 과업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왕하 11:21). 그 첫째가 언약의 동맹입니다. 왕과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약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워 새 왕도의 출발을 튼튼히 하였습니다(왕하11:17). 그 둘째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선왕 때 자리잡은 바알 신당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 맛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세워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1:18). 셋째는 중단된 왕정을 복구함으로 명실공히 다윗의 왕통을 계승하였습니다(왕하 11:19). 그 결과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안하더라(왕하 11:20)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신명(神命)을 좇아 왕도를 걷는새 역사의 걸음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역사는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사는 무의미의 반복도 아닙니다.물론 변증법적 진화의 산물도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이 성을 세우고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집을 짓기도 하고 헐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공간을 주시고 역사를 존속시키는 시간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사람도 주십니다. 역사는 구속사 성취의 내용과 목적을 가득히 담고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자신의 운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세계에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통치 역사에 수종들도록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달랴같은 악한 여인의 학정을 통하여, 하나님 떠난 인간의 도모가 얼마나 무섭고 또 그것이 얼마나 천벌 받을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떠난 인간의 도모는 그 자체가 무서운 심판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한 인간의 소행은 바로 사탄의도구임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알고 보면 하나님과 싸우는 극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주구(走狗)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세바 같은 신앙의 여인을 통하여 꺼져 가는 이스라엘의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호세바에게 주신 신앙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이어 가실 구속의 약속 곧 이스라엘의등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거룩한 왕명이었습니다. 불신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지존무상의 왕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왕명에 따라 목숨을 걸고 다윗의 적손 요아스를 죽음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왕명이 그녀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사명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그 왕명이 그녀로 하여금 그처럼신나게 살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나 그와 동맹한 여러 류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거룩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의 왕명에 따라 놓쳐 버린 왕도를, 잃어버릴 뻔한 선민의 왕도를 되찾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과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하면서 새 왕도를 걸었습니다. 이것은 새 역사를 창조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축복이요 영예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
- "성령이 오셨네"
2014년 한 해를 성령님에 관한 말씀으로 달려왔습니다 성령충만 성령세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등등 성령님 성령님등 성령님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고 전하면서 달려왔습니다 (행 2:1-13)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이땅에 계시다가 하나님 우편으로 가시면서 몇날이 못되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리라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 말씀하신대로 보혜사 성령이 오셨습니다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오순절이 바로 교회의 창립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기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잡을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늦게 부활절 사건 직후로 들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을 계기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였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순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다운 사역을 시작한 시점이 언제냐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선교와 예배와 능력과 기적은 오순절 이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 바로 앞에 요한복음이 있는데 그 마지막 21장에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20장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1장으로 넘어가면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라고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요21:2)고 하며 갈릴리 바닷가로 나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섰고 그들이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묻습니다. 그때까지 빈 손이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이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지만 그 앞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만약 부활절 이전에 발생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부활절 이후에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절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목표도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제가 오순절이 교회 탄생일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부활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날이었다면, 오순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온 날입니다. 즉 주체적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자기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과 확신을 갖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지식들과 당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뼈저린 깨달음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것이 되었을 때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주님의 그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져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이 바로 그런 일을 우리 안에서 일으킵니다. 오순절 이후가 되어서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더 이상 어리석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장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떠나지 말라. 기다려라. 주님은 제자들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단 기다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 10일 후인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활을 목격하고도 목적의식도 없이 헤매던 베드로가 담대히 그리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보다 더 큰 능력들을 제자들이 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이런 오순절 사건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녀가 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입니다. 사람 중에도 그냥 사는 사람이 있고,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령을 받은 교회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다루고 있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은 어떤 분이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람 같은 성령 성령은 바람 같습니다.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급하고 강한 바람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하였습니다. 그 ‘영’을 헬라어로 ‘프뉴마’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 합니다. ‘루아흐’는 숨결 혹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영혼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호흡이며 태풍입니다. 느낄 수 있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하나님의 영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그냥 살랑거리거나 선선한 바람이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거친 바람입니다. 마치 토네이도와 같고 태풍과도 같은 바람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거대한 토네이도, 즉 회오리바람이 불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니 집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은 역사에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입니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단지 풍향계일 뿐입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하여 몰려들고 손가락을 들고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나 살피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날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그 곳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불 같은 성령 성령은 또한 불과 같습니다. 3절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불꽃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갈라지며 피어오릅니다. 이런 불꽃이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구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은 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에서는 시내 산에서 강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하나님의 불이 임한 곳에서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임했던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말씀의 불이 임하면 잠잠하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 불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훈련과 공부는 마치 장작을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어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런 점에서 훈련이나 공부는 하지 않고 성령만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불이 붙더라도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 쌓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요한 웨슬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령의 불을 받기 이전까지 매우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미국에 선교사로도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고 바다의 폭풍에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올더스게이트란 곳에서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38년 5월 24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의 회심’이라 하며 감리교에서 기념주일로 지키는 유명한 웨슬리의 중생 체험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페터레인이란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다시 한 번 성령체험을 합니다. 1739년 1월 1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미스터 홀, 킨친, 잉함, 휫필드, 허친스, 그리고 나의 동생 찰스가 우리의 형제(모라비안) 60여 명과 함께 페터레인 애찬회에 참석하였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경외와 놀라움으로 사로잡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후 요한 웨슬리의 설교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복음을 전했던 곳에는 술집과 극장이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내 교구다” 하며 그의 생애 동안 말을 타고 25만 마일을 다녔으며, 하루 평균 4, 5회 꼴로 총 42,000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도 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했을 때서야 비로소 그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건훈련과 성경의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지 않은 마른 장작은 아무 쓸데없습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베드로가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석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불이었습니다. 불이 붙자 그는 달변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제사장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배우지 못한 범인으로 알았는데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그 얼었던 입술을 녹이고, 흩어졌던 지식들을 하나로 엮었던 것입니다. 몰라서나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는 듣는 사람에게 망치와 같은 충격으로 떨어집니다. 성령의 방언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 말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영의 언어라는 그 신비적 방언이 아닙니다. 4절부터 12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면 그것이 각 민족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라 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다 유대의 명절이 되거나, 노년이 되면 예루살렘에 거하기 위해 그곳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각 나라의 언어로 갈릴리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자들의 입에서 외국어가 술술 나왔던 것입니다. 거침없이 영어 방언을 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니 차라리 우리 자녀들을 성경 읽고 기도에만 전념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 받아 영어 방언을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방언이 터진 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며 이 때가 유대력으로 정월 14일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와서 시내 산에 이른 것이 삼월이었습니다(출19:1). 그러니 대충 따지면 오순절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미드라쉬의 해석에 의하면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당시 세계의 모든 언어라고 생각했던 70개국의 언어로 선포되었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백성들이 들어야 될 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 세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각국 언어로 선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인생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각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방언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 입술을 녹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는 또한 민족이나 언어의 경계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의 언어는 혼잡케 되었습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고 민족의 특권을 주장하며 서로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은 선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안에서는 어떤 특권이나 차별이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경계나 특권이 사라집니다. 성령은 담을 허뭅니다. 민족의 담과 피부색의 담과 계층의 담과 이념의 담을 허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고집쟁이가 되고 더 편협해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새 술에 취한 사람들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13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술 취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즐겁습니다. 모두가 친구가 됩니다. 성령이 취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의 사명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기쁨으로 생활합니다.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사귑니다.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한 말 또 하고 반복하는데 그것은 곧 ‘예수 믿으라’는 이 한 마디입니다. 고전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는 단계입니까? 좋아하는 단계입니까? 아니면 즐기고 있는 단계입니까?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즐거워서 하고 있습니까? 참고 인내하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만 내일의 행복을 꿈꾸며 괴롭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즐거워 기쁨과 감사로 하고 있습니까? 술 취한 사람들은 즐겁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이유 없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굴러가는 휴지 하나를 보아도 새롭습니다. 즐거움은 우리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가득 부어질 때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로 기뻐하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부은바 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즐거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술꾼이 술기운으로 살아가듯 우리는 성령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성령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중독자들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위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실화]기도가 불법이 될 때도 기도하시겠습니까?](https://i.ytimg.com/vi/hG8KRQ9eQnY/hqdefault.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