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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 평화교회 청년대학부 찬양대회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우리 때문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설교일 : 2014년 9월 수요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6:33 마태복음 6장/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세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장 낮은 수준의 생각을 가진 삶입니다. 둘째로는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철학의 단계의 삶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준 높은 단계의 삶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삶의 질이라는 것은 동물과 같은 이 땅과 육체에 한정된 생각을 가진 단계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 모든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저 하루 먹고 살면 그 다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단계는 지극히 동물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둘째 단계의 삶은 철학의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철학의 단계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먹고, 마시는 단계를 초월하여 조금 더 인생을 생각하는 단계에 속한 사람들의 프래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어요. 이 사람들이 세상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세상에 한정되어 있기에 첫 번째 단계의 사람이나, 두 번째 단계에 속한 사람이나 사실은 같습니다. 그들은 더 높은 수준의 프래임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속한 수준을 초월할 수 없지만, 그 이상의 프래임을 가져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속한 생각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마지막 단계의 생각은 창조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창조의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꼴로 만드셨어요. 그 다음에 그 인간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할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 첫 사람 아담의 수준은 하나님보다 높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탁월한 권세가 있었어요. 그 권세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매인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죄까지도 다스릴 수 있도록 힘을 주셨어요.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워하시는 천국과 같은 곳으로 만들게 하셨어요. 그런데, 그 놀라운 권세와 힘으로 죄를 억제하고 이기지 못하고 죄를 선택함으로 죄에게 종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인식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수준이 어떤 수준에 머물러 있는 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깨닫고 내 생각의 틀을 하나님 쪽으로 맞추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일주일 가운데 주일 아침은 모든 바쁘게 가던 걸음을 멈추어 서서 그저 몸만 쉬는 날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고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는 가장 축복의 날입니다. 이 날 우리가 생각도 없고 아무런 결단도 없이 교회를 나가는 것이 반복되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혼자서 생각하면 방향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방향이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면서부터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물질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끌려 다니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인간은 가장 낮은 하위 수준에 떨어져서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가장 낮은 수준에 떨어진 우리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배를 주셨습니다. 그 예배가 회복될 때 인생은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생각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가 자기에게 물려줄 유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자 그 도시에 갑작스러운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흉년이 찾아와요. 먹을 것이 없어지고 친구도 떠나요. 그래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찾았어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 올렸어요. 그리고 그는 아버지 집에 있는 풍성한 양식들을 생각했어요. 입을 것, 먹을 것, 잠 잘 곳을 생각했어요. 아버지 집에는 없는 것이 없지 않느냐? 아버지 집에 돌아가면 무언가가 해결될 것을 믿었어요. 그리고 거지 꼴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미 아버지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 모습이 나타나자마자 그 먼 거리를 달려와서 아들을 맞이해 주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여 주었어요. 이 아버지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너무도 중요합니다. 마태보음 6장 26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도 그렇게 기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사람은 얼마나 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위치는 자식을 책임져야할 위치입니다. 자식이 잘 못사는 것은 첫 번째로 아버지의 잘못입니다. 좋은 아버지는 자식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좋은 아버지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깊이 경험하기는 어려워요. 주님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부족해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식은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 자식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마셨어요. 그래서 술을 토해서 온 몸이 엉망이 되는데, 그런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기 옷으로 문지르고 아버지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이 있어요. 그 자식들은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못된 아버지라고 해도 잘 섬겨야 할 이유는 그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아버지를 이해 할 수 없어요. 우리가 그것까지 다 깨닫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성경을 주셔서 하나님의 법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셨어요. '부모를 공경하라. 네 눈에 틀렸다고 해도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그러나 공경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저주하리라.'고 주님이 협박까지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복종이라도 하게 하셔서 복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이게 주시는말씀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하늘의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똑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죄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어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아들은 이삭을 데리고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산 위로 올라가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이삭이 전혀 반항하지 않아요. 그저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뿐이었어요. 이삭은 아버지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율법을 통해서 배웠어요. 그리고 그 순간에 온전히 제물이 되어서 순종했어요. 이삭은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목숨과 모든 것을 맡겨 놓았어요.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사상을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인사하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신앙의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서는 집안의 어른이 오시면, 그냥 인사를 하지 않아요. 방에 모시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온 몸을 엎드려서 큰 절을 올립니다. 그것은 공경한다는 마음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큰 절을 올릴 수 있는마음이 우리에게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라는 분명한 사상이 필요합니다.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몰라서 그렇지, 무조건 좋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사랑의 프래임을 갖게 되면, 여러분의 믿음은 쭉쭉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은 내가 무엇을 먹을까, 내가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들을 아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이다.'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믿어지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우리가 기도하다가 실망하는 일이 없어져요. 우리가 힘들어 지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당하기 때문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자기에게 그 순간에 응답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2.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프래임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명한 사상을 갖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적극적인 태도를 갖을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가 뒤에 있으면 아이들은 자신감이 생겨요. 자기는 힘이 없고 아버지가 병이 들어 힘이 없어도, 그 아이에게 아버지는 매우 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 하위 수준의 생각을 가지고 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힘 빠진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만나기만 하면 힘이 빠지는 소리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도와줘야 겠지요? 그런데 입에 언제 힘 빠지는 소리가 입에 배어져 있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요즈음은 적자입니다. 제가 인건비 따먹고 살아요.' 그 분이 가게를 하는데, 단 한 번도 이문이 났다는 말이 없는데, 집도 사고 사고 싶은 것도 잘 사요. 그래서 불쌍해서 기도해 주었어요. 집도 사고 사업 장도 넓혀 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물었어요. '요즈음도 어렵고 적자를 보십니까?'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먹을 것을 줄이고 지출을 막으면서 먹을 것도 줄이면서 일을 했어요.' 라고 말합니다. 너무 하위 수준의 프래임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안되고 있다면, 말을 바꾸십시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제가 요즈음 하나님께 단단히 훈련을 받고 있어요. 제가 요즈음 하나님께 매를 맞고 있어요. 그래서 더 기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좋아요? 먹을 것이 아직 하루치 더 남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빈 그릇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도 좋으신 분이거든요. 주님은 긍정적인 것이고 믿음이 있는 고백을 순간마다 심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지파별 지도자를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열 명의 탁월한 지도자들이 모든 백성들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십시오. 열 두 명 가운데서 열 명의 보고 내용이 뭐에요? '그 땅은 너무 좋은 땅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비해서 메뚜기와도 같아서 도저히 그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라고 보고 했어요. 열 명의 정탐꾼의 생각은 메뚜기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온 적이 없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정탐 후에 나타나게 되었어요. 그들의 말을 들은 모든 백성들이 밤새 울면서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염려에 빠지게 되었어요. 미래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어요.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올라갑시다.'라고 호소했어요. 그러나 백성들은 그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돌을 들어서 오히려 쳐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더니 결국 목적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길에서 방황하다가 인생을 끝내지 않던가요?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방황을 하고 인생을 끝내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너무 많아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마음과 보는 눈이 달랐어요.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눈에 보이는 현실과 현상은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의 눈은 하나님의 눈과 마주쳐 있었어요.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반대하고 돌로 죽이려고 할 때에도 앞에 나아가서 그들을 막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안되는 것을 보지 않고, 언제나 되는 쪽으로 보게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결론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 존경할 만해요. 싸우려고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정도 긍정으로 바꾸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3.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프래임을 가지십시오. 그러면서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프래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하라'는 말은 매우 적극적이고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간절히 구하고, 그 천국 건설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 아버지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이 뭐에요?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그분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기준입니다. 그것을 우리도 갖도록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의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의로움과 그분이 가지고 계신 뜻을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만 되면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만 가져도 여러분은 승리할 수 있어요. 이 약속만 가지고도 여러분은 몸 바쳐서 죽도록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어요. 이 약속이 믿어지면 인생은 아주 간단해 지고 쉬워집니다. 문제는 그 믿음이 없어서 매일 고생하고 짜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생각으로 바꾸면 인생은 보장된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다면.............생각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바꾸면 신앙생활은 아주 쉬워요. 갑작스러운 사고가 나면 '왜 나는 되는 것이 없어.'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깨닫게 하시는구나.'하고 생각만 바꾸면 여러분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쉬워집니다. 이것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 깊고, 아주 지적이고, 따듯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열정이 있어요. 이것은 학교 공부를 많이 한 것하고는 전혀 달라요. 제 어머니를 뵈면, 어릴 적에 학교 다니다가 북한군이 쳐 들어와서 전쟁을 겪어야 했어요. 그리고 부모님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배운 것이 없어요. 그런데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언제나 하나님 중심,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중심을 가지고 계세요. 다른 사람하고 싸우는 것이 거의 없어요. 싸우는 것보다 손해보는 것을 선택하세요. 그러니 사람들이 다 좋아하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세요. 이 세상을 보면, 먹고 사는 문제, 쾌락의 문제에 집중하도록 모든 프로그램과 시스템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신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거기에 시간과 물질과 생각을 다 빼앗겨 버리고 있다면 안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든 것들이 뭐에요? 예수님께서 안타까우셔서 말씀하시는 것들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즐기는 것들............이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인의 자녀들이 가졌던 생각의 프래임이 무엇입니까? 노아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생각의 프래임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프래임이 뭐였어요? 그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의 쾌락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어요. 그들이 싸우는 모든 이유를 보십시오. 이 시대가 싸우고 있는 모든 이유의 근저를 보십시오. 자기가 조금 더 먹고, 조금 더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세상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죄악 때문에 멸망하게 될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들어간 롯을 보십시오. 현상을 좇아간 사람의 최후를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이 세상이 지금 그래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보면, 너무도 대단해요. 자기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초월했어요.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어요. 준비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어떻게 똑같은 이슬을 먹었는데 뱀은 독을 만들어 내고 벌은 꿀을 만들어 냅니까?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왜? 내게? 왜, 나만 이런 일이 생길까?"라고하는 질문은 없어져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사라져요. 아이들을 보면,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지식을 채우는 과정이에요. 하위 수준의 프래임을 갖고 있게 되면 삶 자체가 답이 없고, 언제나 의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나만? 하고 있으면 안되요. 어떤 한 청년에게 한 가지 일을 맡겨 보았습니다. "왜, 나만 시켜요?"라고 하는 말을 나올 때까지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말을 안해요. 그래서 들어보니, '저는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 좋아요.' 그렇게 말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왜? 나를?" 이라고 합니다. "왜, 저에게만 큰 부담을 주십니까?" 라는 신앙을 뛰어 넘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 때는 영적인 세계를 보는 프래임을 보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완전히 믿어지는 순간! 의문은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먼저 건설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건설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이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지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지금의 삶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위 수준의 프래임을 가진 사람과, 하위 수준의 사람이 가진 프래임은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생각해 보면, 상위 수준의 신앙생활과 하위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 달라요. 자기 수준을 높여 가야 하지 않습니까? 영적 세계에서 높여 가려는 생각이 없이는 높여질 수가 없어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높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고, 들여다보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생각은 하나님의 틀에 맞추어진 생각입니다.

  • 광야의 시험-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2)

    설교일 : 2014년 7월 새벽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4:5-7절 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절"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돌이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으니라 하신대" 사단의 첫번째 시험은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먹는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첫번째 시험인,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시험은? 곧 하나님의 주권인정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렇기에 그 시험은 단순히 먹는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그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해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시간은 평생의 시간 곧 4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믿는자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시험을 보십시오. 그 시험의 내용은 모두가 "하나님이냐? 내 자신이냐?"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시험을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분 안에 들어가는 길 밖에 없어요. *이제 두 번째 시험을 보세요. 그 시험의 내용을 깊이 보지 않으면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너를 사랑하고 너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면 성전 위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아주 교묘한 술책이 들어 있습니다. 결국, 내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는 시험입니다. 얼마나 네 자신의 믿음이 좋은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모르고 속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해 집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성전 꼭대기에서라도 뛰어 내리고 싶어집니다. 사단의 유혹은? 1. 사단의 유혹은 믿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내가 볼 때 너에게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맞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너를 상하게 하시겠느냐? 그것도 하나님의 집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아들인 너를 보호할 것이다. 천사들을 동원해서 너의 발이 땅에 떨어져 상하기 전에 붙들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뛰어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2. 사단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6절) 예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무엇 때문에 사단이 던져주는 유혹의 덫에 걸릴 필요가 있어요? 시험의 순간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결국 의심을 심어 줍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던져 줍니다. 분명히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이 들어오는 순간 아주 달콤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창세기 3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은 누구에게 역사합니까?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렇기에 유혹을 받고 사단의 음성대로 움직이는 사람의 특징이 뭐에요? 1) 그 속에 간교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그때 여자가 뱀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합니까? 2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맞았어요. 그런데 그 뒤의 대답은 틀렸어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즉시로 뱀이 직접적인 화법으로 그 빈틈으로 들어옵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뱀의 속임수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말하게 합니다. 그렇게 여자가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받는 순간 그 여인이 평소에 생각하던 생각을 입으로 말한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희석 시켜서 자기의 욕구를 좇습니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7절에서 분명하고도 단호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빈틈을 주는 순간 사단은 즉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치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만족스럽게 따서 먹었습니다. 그 사단의 전략은 예수님께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단의 전략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내 자신의 쾌락과 내 안목과 내 자아를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결국 나를 만족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와 같이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가장 큰 대적과 우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아를 숭배하고 높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 창조 목적을 망각해 버리게 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외에 없어요. 그런데 끊임없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자기 영광을 위해 달려가려 해요. 그럼에도 그 속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생각에서는 조금도 의심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사단의 포장되어진 유혹에 스스로 속고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도 주셨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단의 유도되어진 말을 들으면서"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동의합니다. 동의하고 대답하는 순간 이미 반은 넘어간 것입니다. *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구의 음성만 들어야 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누구의 음성만 듣고 끝까지 믿어야 했어요?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다면 이런 종류의 사단이 던지는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요. 그 음성을 듣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성전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발을 상하지 않게 하신다고 할찌라도요. 3. 사단의 유혹의 목적은 내 자아실현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립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 자신과 자아의 만족과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절대로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여러분이 가진 믿음으로 구하면 교만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1. 시험을 이기려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십시오. 1)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어라. 2) 의의 흉배를 붙이라. 3)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어라. 4)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화전을 소멸 5) 구원의 투구를 써라. 6)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말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1) 이대로 무장한다면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등은 완전히 빈틈입니다. 이기려면 대적자가 내 등 뒤로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가 입고 있는 갑옷 사이로 우연히 날아온 활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갑옷을 두텁게 입으면 뭐합니까? 자기도 모르고 방심하던 아주 작은 틈으로 활이 들어와요. 결국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누가 전쟁에 죽으려고 가겠습니까? 이기려고 하지요? 2) 이기려면? (1) 자기 몸을 방어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발을 보호하는 신,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2) 공격용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공격용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공격용 모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첫 사람이 철저하게 실패했던 부분에서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까? 사단을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무기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말씀인데, 성령의 검과같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단을 물리치셨습니까? 또한 사단이 물리친다고 해도 물러갑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성령의 검인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은 물러갑니다. 2. 이기려면, 내가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들어야 분의 음성만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가인이 왜 실패했습니까? 들어야 할 분의 음성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왜 금과 은과 옷 때문에 실패합니까?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살지를 판단하세요. 들려지는 음성이 많은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음성을 듣는 때입니다. *시험은 어떻게 이깁니까? 하나님의 음성만 들을 때 시험은 이깁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요,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곧 하나님의 음성에만 집중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능치 못할 것이 없어요. 맞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사단의 시험임을 잘 아셨어요. 이 시험을 대비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의 믿음을 결코 자랑하지 마세요. 고개를 쳐 드는 순간 여러분은 그 교만 때문에 넘어지는 것도 모르고 넘어집니다. 아멘.

  • 광야의 시험-돌이 떡이 되게 하라 (1)

    설교일 : 2014년 6월 새벽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마태복음 4:1-11 진정한 신앙생활의 시작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광야를 지나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제일먼저 어디로 가셨어요? 이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뭐에요?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의 시작은 광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광야로 들어가시는데, 그곳에 성령에게 이끌리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1.광야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된 후에,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거룩한 곳이었던 에덴 동산에서도 마귀의 시험과 유혹은 있었습니다. 하물며 죄악이 번성하는 광야 땅에서는 얼마나 그 시험이 크겠어요? 인생의 역사를 보십시오. 사단의 시험이 없었던 적이 언제입니까? 한 번 유혹을 받고 넘어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번 넘어가서 더러워지면 그 다음 죄를 짓는 것은 쉽습니다. 그 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 되지 못하게 막지 못하면 여러분의 인격이 됩니다. 결국 사단의 목표는 우리의 인격과 뼛속 깊이까지 하나님을 대적하여 서게 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대적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첫 사람 아담이 실패했던 시험을 예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친히 이기시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시험은 이렇게 이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제 시험이 있습니까? 1) 영적으로 가장 충만하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2) 육체적으로 가장 민감할 때 시험이 찾아옵니다. 3) 내가 현재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서 시험이 찾아옵니다. 2. 광야에서는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1절) 광야에는 하나님의 통치도 있지만, 마귀의 시험이 항상 존재합니다. 성령의 이끌림이 없이 그냥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되면 넘어집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서 첫 사람이 아담이 실패했던 시험을 받으셨어요.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구름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광야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뭐에요? 광야에서는 무조건 성령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입니까? 1)성령에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2)성령님께 내 의지를 맡기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3)거룩한 성령께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4)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5)성령충만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6)결국,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언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우리가 죄를 이기고 말씀이 지배하게 될 때입니다. 내 생각을 사단이 이기게 내버려 두면 죄 짓는 것입니다. 3. 광야의 첫번째 마귀의 시험은 먹을 것에 대한 시험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받았던 시험이 뭐에요? 선악과를 먹는 문제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이 뭐에요? 먹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받았던 첫번째 시험이 뭐였어요? 먹는 것입니다. 에서가 받았던 시험도 팥죽 한 그릇의 시험이었어요. 실패한 사람들은 언제나 먹는 것 때문에 넘어졌어요. 먹는 것 때문에 사명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제일 먼저 시험을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먹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광야의 성도들이 광야에서 가장 통과하기 어려운 것이 뭐에요? 먹고 마시는 문제였어요. 그리고 먹고 마시는 문제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가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죽었어요. 그마만큼 광야에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돌을 가지고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게 하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떡을 공급해 주시고 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요. 그것은 조금만 움직이려고 하면 양식을 먹을 수가 있어요. 그것이 충분하지 못할찌라도 굶어 죽지는 않도록 주세요. 여러분 룻기에서 무엇 때문에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이 베들레헴 땅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갔겠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베들레헴 땅에 떡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의 역사와 부흥이 있었던 땅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먹을 것이 없게 되니 사람들이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4.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능히 승리하려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이끌림을 받으려면 반드시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을 잘 세워야 합니다.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실패하고 말아요.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무엇을 하셨어요? 기도하셨고 말씀을 묵상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하셨어요. 그 순간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순간입니다. 그렇기에 광야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에요? 1) 성령 충만, 성령과 불 침례 2)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인식 3)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특별히 예수께서는 말씀만 암송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많이 암송한다고해서 마귀가 도망하지 않아요. 그 말씀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귀가 첫번째 시험에서 패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의 유혹을 물리치셨어요. 어떻게 마귀를 물리치셨습니까? 분명히 예수께서는 배가 고프신데 배고픈 것 때문에 마귀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첫 사람 아담은 배는 부르고 풍성했어요.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어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잠겨 있지를 못했어요. 언제 마귀가 무엇을 가지고 도전해 옵니까?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단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4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분명히 먹을 것이 들어가야 살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세요. 그 말씀을 보면, 광야의 성도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성도들에게 매일 40년 동안 굶기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 신명기 8장 3절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세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함심이니라." 광야의 성도들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하늘 양식, 곧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없이 이 땅에서 먹는 양식만으로 배불리고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꿀 송이보다 더 단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씀을 벗어나서 다른 세상 것을 먼저 먹으려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채워지면 물질적 풍요에 묶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가졌다고 해서, 우리의 소유가 많이 늘어났다고 해서 평안할까요? 오늘 나의 생명이 주님의 손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평안은 소유의 많음에 있지 않아요. 사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저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가난을 경험해 보았어요. 그런데 가난해서 물질이 없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렇게 너무 먹을 것이 없으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나마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처럼 비참함이 어디있겠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에 모든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영과 육의 궁핍함에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물질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뭐에요?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시험과 훈련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5. 시험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시 찾아옵니다. (5절) 시험은 한 번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욥에게 다가왔습니다. 한 번에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험은 반복 적으로 끝까지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해야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빈 틈을 막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요. 기억하십시요.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승리하십시요. 마귀의 유혹이나 하나님이 주시는 테스트 시험은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시험이든지 유혹이든지 넘어서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거룩

    설교일 : 2014년 5월 새벽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벧전 1:13-17 하나님을 우리에게 거룩하라 명령하십니다. 그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거룩은 곧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입니다. 1. 거룩과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 1) 거룩할 것(레11:44,45, 레19:2, 레20:26, 민15:40, 고후7:1, 살전4:3,4,7) 2) 완전할 것(창17:1, 신18:13) 3) 성결할 것(사52:1, 사52:11) 4) 공의와 겸손으로 행할 것(미6:8, 습2:3) 5) 온전할 것(마5:48) 6) 부정한 것에서 떠날 것(사52:11, 고후6:14-17, 신13:17) 7) 범죄치 말 것(시4:4, 요5:14, 고전15:34) 8) 악을 미워할 것(시97:10) 9) 부도덕한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것(엡5:3) 10) 빛의 자녀처럼 행할 것(엡5:8-11) 11) 음란을 버릴 것(살전4:3,4, 7) 12)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것(살전5:22,23) 13) 자신을 지켜 정결할 것(딤전4:12, 딤전5:22) 14) 불의에서 떠날 것(딤후2:19) 15) 죄에 참예하지 말 것(계18:4) 16)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을 것(히12:14) 17)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출20:8,9, 느13:22, 렘17:22-24) 18) 순종하는 생활을 할 것(욥6:10, 벧전1:2) 2. 성도가 거룩해야 되는 이유 1)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레11:44,45, 레19:2, 레20:26, 마5:48, 벧전1:15,16) 2)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에(롬11:16) 3)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고후5:14,15) 4)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위해(벧전1:15, 벧후3:11) 5)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하여(레21:6) 6)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살전 4:7, 히12:14, 벧전1:15) 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롬12:1) 8) 거룩한 길로 다니기 위해(사35:8) 9) 성도의 몸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때문에(고전3:16,17) 10)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딤후2:21) 11) 주님을 보기 위해(히12:14) 12) 하나님 나라와 기업을 얻기 위해(엡5:5) 3. 거룩하게 되는 방법 1)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벧전3:15) 2) 성령의 역사로(롬15:16, 고전6:11, 살후2:13) 3) 하나님의 은혜로(딛2:11, 12) 4) 하나님의 말씀으로(요17:17-19, 행20:32, 딤전4:5) 5) 기도로(딤전4:5) 6) 순종함으로(롬6:19, 롬6:22) 7) 하나님의 징계로(히12:10) 8)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고후7:1) 9) 사랑함으로(살전3:12,13) 10) 몸을 구별함으로(레11:44,45) 11)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함으로(민15:40) 12) 악을 미워함으로(시97:10) 13) 부정한 것에서 떠남으로(사52:11) 14) 범죄를 제거함으로(정신적, 영적 -마5:29,30) 15)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아니함으로(고후6:14-17) 16)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림으로(살전5:22,23) 4. 거룩하게 된 자의 결과 1) 영생을 얻음(롬6:22) 2) 하나님을 보게 됨(마5:8) 3) 기업을 얻음(행20:32, 행26:18) 4) 주를 보게 됨(히12:14) 5. 거룩의 정도 1) 하나님처럼(벧전1:15) 2)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도록(살전3:13, 엡1:4, 엡5:27, 골1:22) 3) 온전하게 되도록(고후7:1, 살전5:23) 결론: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아가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라. 매일 매일 거룩한 삶을 위하여 회개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라. 아멘.

  •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설교일 : 2014년 4월 수요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빌립보서 4:4-7 우리의 삶 자체는 시험의 연속입니다. 시험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 속에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모든 스트레스는 죄로 인해서 시작된 불순물들입니다. 죄는 불신과 불순종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불신, 곧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믿으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생은 심각한 죄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 사이에서 언제나 하나님 중심과 인간 중심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갈등이 크다는 것과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 속에 뭍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그 스트레스를 염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에 염려하는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모르드게와 에스더의 긴박한 상황을 보십시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긴박한 상황을 보십시오. 다윗의 쫓기는 긴박한 상황. 요셉의 노예가 되어진 상황.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상황. 그들의 현실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스트레스와 긴박한 상황을 어떻게 가져갑니까? 그들은 그 스트레스에 묶이지 않고 염려와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죄악에 묶이거나 붙들리지 않았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요, 염려요, 방황이요 고난과 시험이 끊임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광야 생활 자체는 궁핍함과 외로움과 긴장과 싸움의 한 복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광야 생활을 허락하신 이유는 천국 백성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라 하십니다. 훈련의 장소, 훈련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스트레스에 묶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뻐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Robe-ertson). 바울은 실제로 본 서신을 쓸 당시에 로마 감옥에 투옥(投獄)되어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1:14,17,20-23). 그러 나 그는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생활을 나타냈습니다(2:17). 빌립보 성도들은 바 울이 고난과 감옥 생활 중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그처럼 기뻐한 것(행 16:19-25)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주 안에서'(*, 엔 퀴리오)는 바울의 기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심 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충만한 근거가 되십니다. 2.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에피에이케스'(*) 는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인 인내' 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 내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 심지어 자신을 핍박(逼迫)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 에게 보여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은 성도들이 관용의 태도로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하 고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퀴리오스 엥귀스'(*)는 주의 재림의 소원을 나타내는 '마 라나 타'(*, '주여 오시옵소서', 계 22:20)의 변형 구절입니다. 바울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 오는 것을 믿는 이상 모든 핍박을 인내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약 5:7-9). 3.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로 번역된 헬라어 '메덴 메림나테'(*)는 금지를 나타내는 현재 명령법으로 '염려를 중단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초조해 하거나 불필요한 관심을 쏟지 말라는 것입니다. * 모든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기도'와 '간구'입니다. '기도'의 헬라어 '프로 슈케'(*)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나타내며 '간구'의 헬라어 '데에세이'(*)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 '감사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유카리스티아스'(*)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기도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요소로서 기도하는 자가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 로 순종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평강” 이것은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께 아뢸 때 그 기도의 결 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평화와 확연히 구별됩니다. 세상 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지만,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며 완전하기 때 문입니다. “지키시리라.” 헬라어 '프루레세이(*)는 '호위하리라'는 의미로 군대 용어입니다. 이것은 로마 군대의 수비대가 보초를 서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믿는 자 의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모든 근심과 실망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보호해 줍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 벧엘로 올라 가라

    설교일 : 2014년 3월 금요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창세기 35:9-15 우리는 어쩌면 지금 광야 사십 년을 돌아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요단강가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려면 우리 모두는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자세를 갖추어야하는데…. 이대로 뒤돌아서면 광야에서 죽는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지체하면 영원히 고칠수없는 만성 고질병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하나님의 강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위기인 것 같으나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야할 곳이 있고, 가지말아야 할곳이있습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섬기기만하면 되는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이 세겜 땅에서 큰 고통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땅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위기를 당해서 그 땅이 그를 토하여 내어 칠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의 현장도 이렇게 까지 하실 때가 있습니다. 세겜 땅에서는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없고 섬길수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이 아닌 벧엘에서 야곱을 부르시고 계셨고 기다리셨습니다. 세겜 땅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지 않으신 곳, 사명이 없는 곳, 죄악과 실패만 있는곳, 음모,술수,약탈,복수가 있는 세상입니다. 그곳은 지식의 힘과 개인의 능력이 지배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상에 목표를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목표의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만족 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려움과 시련을 통하여 강한 채찍질과 강권으로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세겜에 지체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제단을 건축하고 맹세와 헌신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은 참된 그리스도의 능력인 영적지식을 얻는 곳입니다. 생명없는 세상의 지식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참된 지식은 내적능력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려면 해야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일이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1)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만 깨달을 수 있다면 회복은 시작됩니다. 야곱의 회복의 순간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십시요. 2)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곧 우리의 누더기 같은 옷을 던져 버리고 의와 진리의 옷, 거룩한 옷, 믿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신앙이 자라지 않고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웃들을 힘들게 하고 자신도 병들어갑니다. 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치명적인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신앙의 고지를 향하여 올라갈때 세상을 섬기고있는 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던져버리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억울함을 당하여도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신앙도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신앙이 변질되어서도 안됩니다. 1)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곳, 2) 사명이 있는 곳, 3) 용서와 축복이 있는 곳, 4) 반드시 예복을 입고 올라가야 하는 곳, 5)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6) 믿음의 환경이 좋은 곳, 7) 미래의 비젼이 주어지는 곳, 벧엘로 올라갑시다. 할렐루야!!

  •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설교일 : 2014년 1월 주일 설교자 : 강효열 목사 본문말씀 : 창세기 4:1-7 가인은 예배를 드리고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 망한 게 아니라 예배를 잘못 드려서 망한 사람입니다. 예배를 잘못 드렸다는 게 뭡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 분명히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리면서 자기를 살피지 않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고 변한 게 없는 예배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수록 더 악해졌습니다. 가인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예배는 결국 스스로 악한 존재임을 드러낸 예배였습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의 예배를 통해서 그동안 누르고 있었던 그의 악한 성품이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 열심으로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드린 마지막 예배가 실패하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된 후를 보십시오. 그 순간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 더욱더 깊이 보이는 거룩하지 못한 자기 자신의 한량없이 부족함 때문에 우는 사람입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그 속에 끓고 있던 분노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들에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서 얼굴 빛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을 죽였습니다. 예배 잘못 드린 것이요, 실패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은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어떠한 그릇, 어떠한 인격의 그릇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수록 오히려 더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예배드려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내가 드리고 싶은 예배를 드린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감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과 자기 방식의 예배가 몸에 배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의 예배가 몸에 배어져서 습관화될수록 그 사람은 더 악해집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정직한 마음, 정직한 땅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 땅은 우리의 마음 밭을 의미하지요. 땅은 아주 정직합니다. 그래서 땅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그 땅에 좋으면 30, 60, 100배 열매 맺습니다. 그러나 나쁜 땅은 심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이 땅의 정직함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성공자는? 1. 죄를 해결 받는 예배자가 되어라. 3-5절을 봅시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결국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시고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드리는 자의 마음밭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물리치는 거짓된 예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도 없이 예배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습관적인 땅이 되어서 묵은 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렘 4:3-4절> "너희 묵을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5절을 봅시다. ‘가인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제물은 그 다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로 인간의 죄를 덮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엔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거 벗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엔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안 받으십니다. 부끄러움, 수치를 가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가죽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한 짐승이 죽었구요. 참된 예배에는 반드시 그 안에 죄를 가리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피를 흘리든지, 가죽으로 덮든지 인간의 죄를 덮는 요소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주신 방법입니다. 아벨은 짐승을 잡았습니다.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 앞에 태웠습니다. 그의 마음 밭은 옥토 밭이었고 정직했습니다. 정직한 자의 예배는 주님 앞에서 내 존재를 깨닫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그가 드린 제물 속에 이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정직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리워진 상태의 마음입니다. 거짓이 뭐에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거짓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입니다. 그 제물이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예배가 어떤 것입니까?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예배자의 삶일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쳐 본 사람이 아니고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 제물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혜와 회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 그렇기에 예배가 성공한 사람의 현상은? 1) 더 큰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갑니다. 2) 더 밝은 소망이 생깁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묶이지 않고 오늘 감사와 함께 미래의 기대감을 갖습니다. 3) 더 깊고 넓은 사랑이 생깁니다. 예배가 성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더 사랑하고 섬기고 싶어지게 됩니다. 2. 자신을 이긴 예배자가 되라. 5-7절을 보십시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누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일까요? 세상을 정복하기 전에 하나님께 정복당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순간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순간 숨겨져 있었던 급하고 악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에 악하고 급한 감정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가 안 드려졌기 때문에 악이 올라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배가 실패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대적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엎신여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인격은 항상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수를 발견한 순간 아버지를 공격하고 대적하는 것을 보세요. 그것이 한번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으로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됨으로 덮여있었던 거짓 평안이었습니다. 그가 정직한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안 받았을 때 자기를 바로 돌아보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혈기를 부리고 얼굴빛을 바꾸고 분을 내었어요. 그리고 예배에 성공한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했어요. 그리고 동생을 죽이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곧 그가 드리는 예배는 자기를 위한 제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 중심,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드렸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언제나 그의 삶이 자기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고 좋으면 그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 중심의 예배는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하려면 불편합니다. 예배는 여러분을 편한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주는 시간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진정한 예배에는 결코 여러분의 편의를 봐주지 않아요. 집안에서도 어른을 한 분 모신다는 것이 그리 쉬운지 아세요?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요, 드림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그 시간에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완전한 제물이 되어지고 죽는 시간입니다. 그러한 예배자가 되었을 때 부어 주시는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가 살아서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만족을 위한 도구로 삼았어요. 언제나 자기 Need, 자기 필요중심으로 사는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정당하게 나를 대하지 않을 때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항의하실만할 정도로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셨다면? 반드시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지않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특징은 온전한 제물을 드리지 못해요.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인격도 이웃을 배려하기 보다는 치고 때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때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바른 예배로 하나님께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분노가 생겼습니다. 분노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공적인 예배자가 될 수 있어요? 어떻게 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예배자가 됩니까? “뱀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결국,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를 위한 완전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 우리의 죄를 해결할 구원의 길은 여인의 후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제물과 방법과 내용이 길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완전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를 완전하게 드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온전하여 거룩한 제물이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그분에게 다스림 받는 자만이 성공적인 예배자입니다. 그 분은 장차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3. 예배를 통하여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하는 예배자.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우리의 예배가 실패하게 되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죄는 강력한 집착과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이긴다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선을 행하며' -야타브(히)는 '바르다. 옳다'는 뜻입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7절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는 인격체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기에 사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죄(사단)이 엎드려 있다는 것입니다. 엎드려(라바쯔)는 맹수가 먹이를 공격하려고 움츠리고 있는 자세입니다. 그렇기에 네가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으면 사단이 너를 공격하려고 움츠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먼저 공격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단을 불러 들입니다. 왜요? 우리 자신이 이미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이미 더러운 태도와 악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다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못해요. 언제나 악과 결탁해서 나오는 악한 인격을 보세요. 말씀을 배운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그런데 알면서도 올은 길을 가지 않고 그른 길을 가요. 여러분이 옳은 것을 모르시나요? 다 알아요. 여러분이 정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시나요?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몰랐나요? 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을 모르세요? 그럴리가 없지요. 그런데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아요. 세상에서도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악함 때문에 사단이 나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그가 엎드려서 나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배 실패한 가인에게 뭐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오히려 네가 사단(죄)을 다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서 선을 행함으로 사단을 다스리라 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으면 사단은 덤비지 못해요. 그렇기에 우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합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할 이유가 없고 선을 행하면 분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무엇입니까? 1)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선입니다.(회개, 방향) 우리는 절대로 내 자신과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과 말씀에 붙들립니다. 그때 우리는 창세기 1장 26-28절에 기록되어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룰 때 선을 이루게 됩니다. 2)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되는 것이 선입니다.(예배자) 신령과 진정은 예배자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신령이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분에게 이끌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진정이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되어 오신 것처럼 우리 자신이 말씀이 육신되기를 소원하고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1) 장소: 넓은 장소와 좁은 장소의 의미-좁은 곳에서 드리는 예배. 출 25장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2) 시간: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3) 마음(몸): 마음과 성품과 뜻, 목숨을 다함 (신 6:5-6, 마22:37-39) (4) 제물(예물): 제사에는 제물, 예배에는 예물. 하나님의 방법에 맞게 하나님께 나가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을 준비해서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 선함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이웃에게도 온전히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 선한 자는 결코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과 감정을 정말 믿으시나요? 여러분의 악함 속에 뭍어서 나오는 악한 인격을 모르세요? 그 감정에 섞여 나오는 말과 행동을 이기셔야 합니다. 만약에 매번 이기지 못하면 여러분은 언제나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단에게 언제나 공격당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방법으로 예배 드려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과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곧 자기 생각, 자기 마음을 주인으로 섬기는 무서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예배 자리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셔야만 합니다. 예배는 내 자신이 살아 있는 제물이 되는 시간임을 잊지 마세요. 결국 가인은 선을 행하지도 못했어요. 왜요? 그 속에 악한 생각과 인격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끌어 오르는 죄악의 분노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죄를 다스리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죄에 사로 잡혀서 동생을 지켜야 할 자의 사명을 잃었습니다. 사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옆으로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물질과 시간과 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입니다. 그것이 예배를 통과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여러분 자신을 시험하는 시험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배에는 성공과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 회색 지대가 없는 것처럼 예배에도 중간 지대, 회색 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냐? 안 받으시는 예배냐? 그렇기에 예배를 드리면서 즐기려고 하지 마세요. 예배를 위로 받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지 마세요. 그것은 예배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다 드리는 것이요, 헌신입니다. 그 후에 우리의 예배가 성공된 후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위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 그러므로 누가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1) 내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라. 2)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라. 3) 은혜의 십자가 아래로 피하라.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 용서와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놀라운 복은 예배를 통해 받는 것입니다. 아벨은 ‘예배는 살아있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예배가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죄 용서가 있는 예배, 분노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예배, 내가 원하는 방식과 인격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를 통해 죄를 이기는 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 담긴 것이 무엇일까

    주의 말씀은 선하지요 선한 분이시니 담아 있는 것도 선하고 하시는 일도 선하지요 듣는 이가 감사하고 따스함이 있으니 정겹고 함께 있고 싶지요 말씀 속에 진리와 사랑이 있고 애정이 있으니 겸손하고 존중하며 듣는 이가 그리워합니다 악한 말은 그릇에 담겨져 있는 것이 마귀 적이지요 그 속에 뼈가있어 창이나 검이 되어 마구잡이 휘둘러서 듣는 이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지요 그 속에 독이 있고 거만이 있고 빈정거림이 있고 위선이 있어 듣는 이가 떠나고 싶고 미움으로 채워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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