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3:4-6)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으며,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당해야할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사형 틀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방법입니다.
로마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는 다릅니다. 그들의 십자가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징계라면,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이라는 대단한 사건이요 뉴스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사순절 주간을 보내면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십자가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저주를 받아야 할 인간
롬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병에도 유전병이 있습니다. 부모나 윗대에서 암이나 특별한 질병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으면 자식들에게 유전되거나 유전될 확률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질병이 유전되어 자식에게 전이되었을 때 사실 자식은 그 병에 대하여 불공평합니다. 건강한 부모를 만났으면 걸리지 않을 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서 갓 태어난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이 됩니까?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들에게는 죄가 전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약속이 아담 한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인류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만들어 놓은 길을 인류가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식인종의 자식이 되면 당연히 식인종이 되고, 해적선 안에는 사랑과 의리가 있지만, 밖에서 해적선을 볼 때에는 해적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해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심판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도 해적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해적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시편 14:3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최상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불행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한 삶을 추구하려는 순간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는 불행의 저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 예배(제사)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만 받고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좀 나쁠 수 있습니다. 다음 제사 때에 아벨처럼 그런 자세로 제사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저주하거나 징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가인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잘못된 제사를 책망하기보다 가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다스릴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하였고, 결국 그 죄로 동생을 죽이는 더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였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도 다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할 불행한 존재입니다. 이 죄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극복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2.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인류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려고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요 섬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죄는 원죄와 자범죄 입니다. 원죄는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죄가 인류에 전가된 것이라면, 자범죄는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므로 발생되는 행위의 죄입니다. 미움과 다툼과 살인 등등의 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시작됩니다. 죄는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합니다. 죄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영원한 사망에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야할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받아야 할 인간을 죄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기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해, 우리의 죄악을 위해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로마 군병의 채찍에 쓰러지고 넘어지며 걸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여섯 시간을 고통당하며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방법으로 십자가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치욕입니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형벌을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사랑과 용서, 희생의 종교라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주님처럼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과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과 용서, 희생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사랑과 용서, 희생이 있으면 아름다워집니다. 인간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던 하나님,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실천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했던 사랑과 용서, 희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86세의 나이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를 죽이려던 총독이 폴리캅에게 “예수를 모독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폴리캅은 “주님은 86년동안 나를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모독하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를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가족을, 이웃을 한 민족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주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의 참된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