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제네바 설교에 담긴, 중요한 예배 원리들


예배 신학과 목회적 적용 (2)암5장 21-24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솔로몬의 통치 이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왕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남 유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그리고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이스라엘은 나머지 열 지파가됩니다.

남유다의 두 지파나 북이스라엘의 10지파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해 약속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오래전 그들의 조상인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여호와의 날, 그들을 대적하던 모든 민족은 멸망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인 자신들은 영광의 나라에 입성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며 믿을 수 없는 예언을 쏟아놓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멸망의 처절한 공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당한 상황을 예언하는것입니다.

그것도 북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던 여로보함 2세때 말입니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이며 북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말입니다.

그 예언자는 아모스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 유다출신의 선지자이지만 활동은 북이스라엘에서 했습니다.

아모스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드고아에서 양을 치며 살던 가난한 목동이며 농부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 선지자는 고향과 본국을 떠나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벧엘로 가서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오염되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이 남 유다로 가버릴것을 두려워한 여로보함은 벧엘에 단을 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을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하나님이라며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교류하던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위해서 비와 좋은 날씨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서 신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며 그들의 사제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으며 음란과 부패가 가득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선민이기 때문에 어떠한 재앙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부요함과 평안함이엇습니다.

18절에 아모스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 5 : 18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하며 여호와의 날에 대적들이 멸망하고 자신들은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이며 축제의 날을 기다리며 소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오해하고 있구나!’

‘여호와의 날을 너희의 대적들이 멸망하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이 징계를 받게 되는 심판의 날이다’

‘너희에게 내려질 심판의 무게와 공포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

아모스는 그날이 마치 이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배가 고픈 사자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얼마쯤 가다 돌아보니 사자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는데 눈앞에 더 무서운 곰이 서있습니다.

곰은 큰 손을 들어 위협하며 잡아 먹으려고 합니다.

곰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도망쳤습니다.

겨우겨우 도망쳐 드디어 자신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쳐 안전한 집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생명을 구했음을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벽에 손을 집는순간 독사에 물리게 되는 상황과 같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생명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몇 번을 도망쳐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날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바를 얻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처지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전쟁으로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고난 가운데 살다가, 사는 것이 하도 고달파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대적을 일으켜 전쟁으로 그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적이 멸망하고 승리의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며 여호와의 날을 소망했건만 여호와의 날의 대적이 바로 자신들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못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도우심과 구원이 되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망하며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아모스 5 : 21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들을 미워하시고 멸시하신다고 하십니다.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3대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유월절은 무교절과 같이 부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첫 곡식을 먹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초실절,오순절, 맥추절이라고도 부르는 절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절기로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선택하셔서 종된 삶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며 기념하는 것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앙의 고백을 드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날로 은혜의 날로 지키는 것은 선택 받은 백성의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런 절기를 가증하게 여기고 경멸하며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처음 왕 여로보암은 매년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종교개혁을 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벧엘에, 성소와 지성소가 아닌 금송아지를,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일 마져도 변경해서 지키게 했습니다.

성소도, 성직도, 거룩한 절기도 자신의 통치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했습니다.

이들은 절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내팽개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불의와 악을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5 : 22

이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는 종교적인 절기와 성회뿐만 아니라 제사도 경멸하신다고 하십니다.

본문에 번제나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속죄제와 속건제와 함께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중요한 제사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모두 태워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처럼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것입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라는 단어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곡식을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곡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과 같은 제사가 소제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번제가 드려질 때 자주 함께 드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번제와 소제가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함께 주신 은혜에 감사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마지막으로 화목제는 관계의 회복을 위해 드려지던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를 갖는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그 담겨진 의미가 선민으로서 중요한 제사인데 이런 제사들을 더 이상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북이스라엘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경멸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단지 종교적인 형식을 잘 갖추었다고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과 진실한 삶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1 절에서 절기와 성회와 같은 종교적 행사에 대해서, 22절에서는 번제, 소제, 화목제와 같은 종교적인 제사예식에 대해서, 그리고 23절에서는 찬양이나 악기연주와 같은 예배행위에 대해서까지 모두 그만 두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5 : 23

이스라엘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는 성회로 모이며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릴때 찬양대가 예배중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르는 찬양을 의미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 찬양대가 찬양을 하며 비파와 수금과 여러 구별된 악기들을 사용해서 연주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찬양대의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는 그저 소리에 불과할 뿐이지 그들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요 가증스러운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별되게 찬양대로 서지만 그들의 삶은 구별되지도 거룩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상의 불의함을 즐거워했습니다.

회중과 구별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제단 앞에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률로 연주하고 노래하지만 그들의 손은 죄로 가득하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악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행하는 종교행위들을 즉시로 중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종교행위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는 정의와 공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본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아니라 종교적인 분위기와 형식만을 위해 습관적으로 예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오직 수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절기를 지내고 성회로 모이며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웅장한 찬양대의 찬양과 아름다운 연주를 하지만 그들의 그런 거룩함은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모양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소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로 가득 차며 제물들도 넘쳐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가운데는 불의와 굽어진 판결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탄식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때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잠간씩 정의가 행해지거나 공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는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말씀은 항상 정의가 완전히 이루어지며 공의가 끊이지않는 사회를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지역들은 건기에는 바짝 마른 땅이었다가 우기가 되면 비로소 물줄기가 지나가는 길이 생겨납니다.

바짝 마른 땅 위에 우기에 쏟아지는 빗물이 물줄기를 만들고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어떤 장애물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흘러내립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건기나 우기처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말랐다 흘렀다 하는 물 줄기나 강 줄기가 아니라 쉬지 않고흐르는 물줄기이며 한번 흐르면 멈추지 않고 넘칠 듯 가득한 강물이 되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결혼하면서 순결을 서약합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는 단지 몇 일에 한번 간음을 하고 그 나머지 결혼생활은 나의 배우자에게 온전하며 신실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단지 다들 그렇게 하는 것처럼 약간의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공의와 정의는 단지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가 되면 마른 땅이 되는 가나안의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를 경멸하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척 아름답게 포장하고 웅장한 건물과 경건한 예식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십니다.

절기를 지키며 성회로 모이고 아름다운 제물이 드려지는 화려하고 웅장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외적으로 드러나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 즉 전 인격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물줄기가 세상의 악하며 어두운 곳들을 무너뜨리고 거침없이 흘러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현장과 삶의 현장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진 거룩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은 세상의 어두움과 죄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것입니다.

세상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암5장 21-24, 창20장 1-8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삶

하나님, 예수님 : 예배, 민주주의, 창조, 섭리, 일, 영생, 천국, 건강, 생명, 사랑, 감사, 용서, 정의, 질서, 평화 등.

마귀(사탄) : 우상숭배, 미신행위, 사회(공산)주의, 도박, 술, 자살, 죽음, 지옥, 미움, 원망, 불의, 무질서, 굿판, 전쟁. 테러 등.

여러분! “한국이 디지털시대에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민족입니다”(루돌프 슈타이너, 독일). 불교, 유교, 단군신화, 동학으로는 디지털시대 세계문명의 새로운 활로를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섭리 성경만 인류의 나아갈 방향과 세계문명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갈 수가 있습니다. 한국은 70년 전 가난, 무지, 미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복음으로 경제대국, 신앙대국,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아시아에 복음화 율이 제일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김구 선생,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교신, 남궁억, 서재필 등 3.1절 독립운동도 기독교가 앞장섰습니다.

한국교회에게 세계를 향하여 : 중세시대 로마교회가 천년동안 그들만의 교리가 되었을 때, 세상에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로마교회를 버리고, 영국교회를 쓰셨습니다. 영국교회가 아프리카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 대영제국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교회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인간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은 영국교회를 버리고, 미국교회를쓰셨습니다. 미국교회는 명령에 순종하여 세계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미국에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1960년대부터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고,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세계를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구촌, 전 세계의 127개국에 약 3만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면적 비율상, 세계 선교사 파송 1위 국가입니다.

우리나라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1. 참된 예배와 선교를 회복하라(암5:21-24).

여러분! 우리에게는 회복해야만 할 영역들이 너무 많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예배의 회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는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좋은 책 한권만 잘 만나도 인생이 바뀌고, 믿음의 사람을 잘 만나면,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를 만나면, 인생의 방황은 끝나고,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와 만남이 회복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승리는 신앙생활의 승리이며, 이것은 인생의 승리로 연결됩니다. 인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실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은 내가 성실하게 노력해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나의 노력, 인간의 노력이 인생의 추진력입니다.

둘째는 은혜의 인생입니다. 이 인생은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인생입니다(시23:1-2). 성실한 인생은 망망대해에서 혼자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인생은 똑같은 배이지만, 돛단배와 같아서 바람을 통해 훨씬 빠르게 목적지로 항해합니다. 이 바람을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바람의 방향을 보고, 믿음의 돛을 올리면, 쉽게 소원의 항구로 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인생의 특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드리며 살아갑니다(시122:1).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일 때문에 교회와 멀어지고, 공부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들을 예배와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봉사자이기 이전에, 먼저 예배자라는 것을 잘 인식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와 달리 손님들을 접대하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눅10:40). 그것은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모르는 행동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은 예배자입니다. 봉사도 귀하지만,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은혜는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형식보다는 본질에 충실하려는 자세에서 시작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절기와 성회(21),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22), 찬양과 연주(23)도 기뻐하지 않고, 받지도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식과 예물과 찬양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보다 믿음과 우리의 마음중심을 보시고, 말씀의 실천을 원하십니다. 실천이 없고 형식만 남아 있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주일과 주일 사이에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롬12:1-2). 교회를 벗어나, 가정과 직장에서도 작은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삶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물같이, 강같이 흐르게 하는 사람입니다(24).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들고 흩어져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고 북방으로, 미국서부와 동부로 가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가야 합니다. 캠퍼스로 가야 합니다. 루이스는‘교회는 거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름이 집안에 있으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거름이 밖으로 나가면, 퇴비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있으면, 노닥거리다가 싸우고 원망하고, 불평하다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면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삶이 예배이며,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상실한 시대에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삶의 많은 부분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함으로삶이 회복되어, 날마다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눈 먼 사람이 낭떠러지로 간다면 : 어떤 눈 먼 사람이 낭떠러지로 난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소리쳤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나를 안내해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순간, 그의 지팡이가 낭떠러지밑으로 ‘뎅그렁 뎅그렁’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청각 장애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낭떠러지를 향해나아갑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 좋은 옷이 필요할까요? 편안한 쉼터가 필요할까요? 위로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그를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소경, 영적인 귀머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들을 살려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마28:19-20).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구름을 타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일은 소경처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참된 예배자, 말씀을 실천하는 자, 그리고 영혼을 살리는 권세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깨끗하고 거룩한 삶(창20:1-8)

무신론, 유물론, 공산주의 : 허위, 증오, 억압, 모순, 물질, 자기실현의 욕구박탈, 지옥 같은 북한. 불교 : 무신론, 허무주의 철학, 범신론, 무속으로 불교가 세상에 한 일이나, 유익을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승(불교인)은 “일 안하고, 군대 안 가고, 세금 안 내는 승려가 많은 나라는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국은 불량언론 유해매체가 전통문화(불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비윤리적이고, 퇴페적인 것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반 기독교적으로 국민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우주첨단과학시대에 IT강국에 점쟁이 100만 명, 도박 비리공화국, OECD국가 중에 계속 자살 1위, 한국은유대인보다 두뇌가 명석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기업가정신, 독특한 가정 중심의 효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우수하지만, 서로싸워서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훈련이 안 된 민족이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은 반 기독교적인 귀신문화, 어두운 문화 때문입니다. 한국의전통문화는 계승하고, 돈을 버는 관관상품은 될 수 있지만, 어두운 귀신문화를 국민의식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21C에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갈 나라가 되려면, 우리나라를 잘못 이끌어가는 정부 언론이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독교복음을 거부하고 선동해도, 절대로 어둠은 빛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남방의 네게브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곳)에 거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왕(기드온의 첩이 세겜에서 낳은 아들)은 사라의 미모에 빠져, 그의 침실로 데려옵니다. 이유는 아브라함이 사라가 너무 예뻐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빼앗을까봐, 자신의 누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리고 와서 아내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던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에 당황하게 됩니다. 롯과 비교해서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아브라함이, 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절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오늘 아브라함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강한 부분과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욕에는 강하지만, 물욕에는 약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욕에는 강하지만, 명예욕에는 약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욕에는 강하지만, 성욕에는 약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연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오늘 발견하고, 우리는 실수가 없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인생을 걸어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비멜렉이 사라를 자기의 침실로 들였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데려간 이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이 말씀을 듣고, 아비멜렉은 사라에게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살려주십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아브라함처럼, 상황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고, 숨기며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모습마저도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온전하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삶에서 가장 순전한 모습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자,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프랑크푸르트 난민교회의 목회자로 존 낙스가 청빙을 받아서, 1554년 12월 초에 부임했다.

낙스는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의 공포와 질병을 넘겼고, 수 년간 프랑스에 저항하다 체포된 죄수의 신분에서 풀려나서, 잉글랜드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통치를 비판하였기에 더 이상 잉글랜드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1554년 9월 24일, 프랑크푸르트 난민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건너올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난민 교회에서는 성공회 예배의 순서를 변경해서 채택하고 있었기에, 낙스는 청빙을 받아들였다. 훗날 스코틀랜드 전체를 장로교회로 바꾸는 결정적인 기여를 남기게 되는데, 개혁신앙으로 회심한 초기부터 낙스는 성만찬의 집례에 있어서 현재 채택된 성공회의 예식 순서를 그대로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예배 내용을 절충한 형식이라서, 여전히 다양한 예식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크부르트 난민교회 안에서 성공회파와 낙스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내용을 놓고서 양측이 격돌하는 매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들은 주변의 이웃 도시들에 있는 교회들에게, 즉 스트라스부르크, 엠덴, 취리히, 제네바 등 다른 곳에 있는 개신교 교회들에게 의견을 청취하자는데 합의하였다. 이처럼 매우 민감한 때에, 『155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논쟁의 개요』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당시에 가장 열열한 장로교회 소속 목회자였던 윌리엄 휫팅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책자가 발간된 것이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영국 왕권의 권세를 활용하여 휫팅햄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려고 하였다. 이 책자의 발간으로 인해서 휫팅햄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낙스를 도와서 영어권 교회를 든든히 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황급히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훗날 그는 제네바에서 매우 중요한 청교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영어로 번역된 『제네바 성경』을 출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1554년 말에 이르자, 성공회를 지지하는 잉글랜드 출신 성도들이 프랑크푸르트로 대거 몰려 들어왔다. 리차드 콕스(Richard Cox, 1500-1581)가 앞장을 서서 낙스의 예배개혁을 거부했고, 왕권의 후원을 얻어서 행동하던 자들은 위세가 등등했다. 가까스로 청교도들과의 협상을 위해서 양 측 대표자들이 선정되었다. 낙스, 휫팅햄 등은 이런 상황 하에서 ”성공회 예식서“(the Book of Church Prayer)의 라틴어 판을 칼빈에게 보내어 조언을 구했다. 당시 칼빈은 유럽의 최고 신학자이자, 거의 모든 개신교회의 대변인이었다.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칼빈은 수많은 지도자들과의 교류하면서 지혜로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칼빈은 잉글랜드 난민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 화합을 촉구하는 매우 부드러운 답변서를 보냈다. 1555년 1월 13일자로 칼빈이 쓴 편지에는 실제적으로 그가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제언하는 목양적인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다. 여기서 필자가 이 편지를 단순히 번역하기 보다는, 핵심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고자 한다.

성경에 기초한 순결한 예배를 주장하는 청교도들과 로마 가톨릭의 예식들을 따라가려는 성공회측이 격돌하고 있던 프랑크푸르트 난민 교회를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교착상태에 빠진 예배의 내용들과 형식을 해결하는 중재자로서, 칼빈은 그들이 취해야 할 입장을 명확히 진단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칼빈은 그들이 지금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칼빈은 지금 그들에게는 종교개혁을 더 진전시키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칼빈은 양측이 교회 개혁이라는 목표를 완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있느냐를 깊이 생각하라고 지적했다. 답변서에 담긴 칼빈의 조언은 두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제네바 당“이라고 알려진 청교도들에게 열심히 지나쳐서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예배 형식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 ”무조건적인 고집“(stubbornness)을 부리는 자들을 상대할 때에 그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너무 비난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아주 작은 것들로 인해서 갈라지지 말라고 조언했다.

둘째로 칼빈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예식서에는 하나님만을 열망하는 순수함이 담겨 있지 않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작은 오류들이 많다”(many silly things)고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에서 익숙해진 것들이 담겨 있어서, 앞으로 더 순결하고 합법적으로 고쳐 나가야 할 것이 많다. 칼빈은 종교개혁이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청교도들(Knox, Whittingham)과 성공회 지도자들(Parry, Lever) 등은 1556년 2월 6일, 스프롯 박사가 작성한 “타협의 예식서”(The Liturgy of Compromise)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공적인 타협안을 시행한 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잉글랜드에서 온 성공회 목회자들이 낙스를 쫒아내는 음모를 꾸며서, 교회는 갈라지고 말았다. 칼빈주의자들 중 일부는 바젤, 취리히, 제네바 등 다른 도시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 시 당국에서는 낙스의 팜프렛에 담긴 내용들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들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용히 떠날 것을 권고하였다. 결국, 그는 3월 26일 제네바로 떠나야만 했다.

프랑크푸르트 난민교회의 분열을 경험한 후 낙스는 참담했지만, 제네바의 영어 회중들은 1555년 11월 1일에 그를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1556년 6월 칼빈의 초청을 받아들였고, 아내와 장모 등 가족들을 대동하여 9월에 도착했다. 당시 제네바에는 전 세계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영어권에서 피신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회중의 목회자로 낙스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제네바는 청교도들의 요람이 되었다. 낙스의 회중은 약 186명 정도였고, 그 후 4년여 동안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다시 1559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낙스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고 전체 국가를 일시에 바꿔놓게 되었다. 그리고 장로교회의 예배를 확실히 세우는 기초를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스코틀랜드 예배 모범”이다.

훗날 휫팅햄도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장로교회의 예배 형식을 정착시켰다. 칼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 다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예배를 갱신하였다. 훗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모인 청교도들이 예배의 기초적인 내용으로 정리한 것들은 거의 다 칼빈에게서 나온 것이다.

대단히 슬프게도, 영국 성공회에 속한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청교도들의 예배원리가 칼빈의 것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전히 패커를 지지하는 입장이 줄곧 나오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 교회가 드린 예배내용들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예배규정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4)를 작성한 청교도들이 작성한 “예배 모범”은 거의 차이가 없다.

필자는 특히 칼빈의 목회적 적용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프랑크푸르트 교회를 위해서 조언한 칼빈의 실제적 적용들에 관한 내용들은 그의 견해가 달라졌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앞에 살펴본 바, 프랑크푸르트의 소용돌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하고 있던 무렵에, 제네바에서 행한 칼빈의 설교들은 매우 중요한 예배원리들이 담겨 있었다. 이 무렵 칼빈은 주로 신명기에 담긴 계명들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예배원리에 관한 내용들이 많았다. 1555년 5월, 칼빈은 신명기 4장에 대한 다섯 번째 설교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지침을 제시했다.

“다시 한 번, 교황주의자들이 교회들 안에서 형상들을 사용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역사가들이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진지한 용모를 갖춘 작은 인형들을 세워놓은 것일 뿐입니다. 한 교회 안에 그토록 빨리 형상을 세워놓을 수 없을 터인데도, 사람들은 그 앞으로 달려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것에 대해서 친절한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이 하는 것보다 더 주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찢어버리는 방안은 만들어낼 사람이 있을까요? 자 여러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그리고,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일 뿐만 아니라, 육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분을 어떤 것으로 표현해 낼 수 있겠습니까? ... 이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지혜이자, 신적인 권세를 가지 신 분을 가장 철처히 지워버리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제2계명을 적용함에 있어서, 칼빈은 그 어떤 형상이나 그림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규정이라고 보았다.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위엄과 권위를 사람의 손가락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바를 단순하게 따라가야만 한다. 그것들에다가 그 어떤 것도 전혀 추가해서는 안 된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 빠져버리게 되면, 그 어떤 경우라하더라도 곧바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정당화하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우리를 벌하실 것이다.”

1555년 6월 17일, 칼빈은 신명기 5장 8-9절에 대한 설교를 했다. 칼빈은 죄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렬해서 타락한 인간들이 우상 숭배로 이끌리게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엄격한 형벌로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반대되는 쪽으로 우상들을 좇아갈 것이다”고 선포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용모를 그린 초상화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엄격한 입장이 청교도와 네덜란드 등 여러 지역 개혁교회의 원칙이 되었고, 루터파에서는 관대하게 허용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합당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