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9년 말쯤 우한에서 들린 코로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니” 하고 넘겼습니다. “중국은 하도 뻥이 많으니” 하면서 말이지요.
한 달 사이에 비로소 국내에 발병 소식이 들릴 때는 “그렇게 뭐 심각하겠어?” 했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한 달 만에 남의 나라 질병으로 여겨졌던 것이 우리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가 어디서부터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 모두의 것이니까요. 모두 함께 짊어지고 걸어가는 중입니다.
2. 교회 1층에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칼국수집이었습니다.
청년부에 왔을 때 식사로 고민하길래 물어보니, 여기서는 음식을 한 번도 안 먹어봤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칼국수집 사장님이 하도 무서워서 목사님·사모님에게도 큰 소리 치고, 그래서 안 간다고.
이유 없이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만 욕 먹으면, 기분 나쁩니다. 그러니 안 먹을 만 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불편한 곳은 안 가려 합니다. 음식점도 교회도, 불편하면 안 갑니다.
그래서 처음엔 청년들을 데리고 칼국수집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시킬 때도 종종 시켜서 먹곤 했습니다. 음식이 맛있어서라기보다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장 간편한 것은 왜 화냈느냐,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이 교회이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칼국수집 사장님 얼굴이 폈습니다. 나중에 지나가던 제게 오셔서 부끄러워하면서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 고마워.”
3. 칼국수집이 중국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장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중국집 사장님 아버님은 목사님입니다. 아들이 음식점을 차린 거지요.
어느날 교회 주방에서 물이 심각하게 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옆 한나 기도실 천장에 물이 고이더니, 급기야 방이 무너졌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윗층에 있는 중국집 주방이 방수가 되지 않아 물이 밑으로 다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나는 모르니 알아서들 하시라”고 했습니다.
방수를 이야기하니, 목사님이 어려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장을 고치는 것은 공동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집주인이 내려와서 무너진 방은 사용하지 말랍니다. 계약을 한 공간인데 마음대로 쓰지 못합니다. 고쳐주지 않으면서, 고쳐 쓰지도 말랍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중국집에 자주 가 밥 먹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 젊은 사장이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을까, 맘이 아렸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손님 오셔도 같이 가고, 맛있다 맛있다 소문 냈습니다.
근데, 정말 맛있었거든요. 이해관계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이웃 관계가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가려면, 저는 휠체어로 계단을 내려가야 합니다. 교회 공간에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 청년들이 없을 땐, 여자 청년 혼자서 하기에 벅찬 일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중국집 사장님이 오셔서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4. 어느날 중국집 사장님께서 갑자기 소천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디스크 수술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어머님이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우리 아들이 죽어가요.” 깜짝 놀라 기도했던 그 날, 젊은 사장님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비어있던 가게는 코로나가 오며 아무도 계약하지 않을 듯 했습니다. 그곳에 닭발집이 들어왔습니다.
5. 1년 내내 텅텅 비어있는 닭발집을 보며 참 미안했습니다. 수요일 사역자들과 함께 닭발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장님은 유일한 손님인 우리를 두고 배달을 가십니다. “목사님 그냥 드시면, 가게문 열어두고 가세요. 배달 다녀올께요.”
어제는 미안한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장님 참 맛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위드 코로나가 되어 교인들도 많이 와서 먹고 하면 좋은데, 그러지 못해 늘 죄송합니다. 내년에는 그런 날이 오면 참 좋겠네요.”
사장님은 망설이더니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년에도 제가 여기 있을까요….” 그만큼 힘들답니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코로나로 인해 꽉꽉 틀어막혀 있어서.
얼마 전에는 갑자기 편도가 부어 119에 실려갔는데, 열이 나서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답니다. 4시간을 길에서 돌아다니다, 결국 죽기 직전 병원에 가 겨우 살았다는 겁니다.
집주인도 너무 힘들고 장사도 힘들고, 이전에 이 가게를 넘겨준 이전 사장님 아버지 목사님도 원망된다고…. 참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죄송해요, 교회가 보탬이 되어주지 못해서.”
돌아오는 대답이 인사보다 따뜻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가끔씩 오셔서 식사해 주시는 것이 도와주시는 거에요. 감사해요.”
6.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 적극적으로 가담한 당사자였습니다.
훗날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재판을 받습니다.
불과 2년 만에 사형을 당하는 그가 재판 받을 당시, 한나 아렌트가 현장에서 참관을 합니다. 그 현장에서 참관한 내용을 쓴 책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재판을 받을 때 그를 본 한나 아렌트는 한 가지 충격에 빠집니다. 나는 그를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평범한가 말입니다.
더불어 그토록 미워했던 독일인인데, 스스로 영향받고 사랑했던 음식과 문화요소 가운데 독일인들이 영향을 준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생각이 자신을 괴롭게 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너무나 평범했던 사람, 관료주의에 물들어 관료로서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잔혹함을 두고,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악은 평범함에 물들어 있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생각하라.’
7. 생각
생각은 나의 욕심과 마주치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생각없이 일상을 살며, 여전히 내가 중심이 된 모습을 마주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당연해”, “어쩔 수 없었어”라는 합리주의에 빠진 우리가 맞서야 하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타자를 향해서는 끊임없이 “너는 틀렸어”라고 지적하며 판단하는 우리의 모순을 말입니다.
8. 평범한 악함은 더욱 위험합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묘한 선의 가면을 쓰고 평범한 악을 감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수의 논리를 말합니다. 다수의 논리는 결국 소수를 무시하고, 탄압하게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잘못을 뉘우치지도, 반성하지도 않습니다. 늘 평범함이 근거가 됩니다. 악함을 타자를 통해 느낄 뿐입니다.
‘정치인이 문제야. 나는 보통사람일뿐인데.’
‘기업가가 문제야. 나는 서민, 중산층 직장인일 뿐이야.’
‘교육이 문제야.’
그래서 평범한 악은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지 못한 대신 타자를 향해 극도로 예리하고 비난하며 힐난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에게 발견하지 못한 악을 마구 마구 끄집어내 통쾌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악을 가리기 위해 온갖 선한 일은 다했던 바리새인처럼 살기, 너무너무 쉽습니다.
9. “저는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우리 모습 속에, 악은 여전히 공존합니다.
싫어하는 정치인, 기업가가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옥에 갇힐 때, 통쾌함을 느낀 일이 없습니까? 나와 맞지 않는 타자가 다가오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가 멀어질 때 안도감을 느낀일은 없습니까?
‘나는 선을 행하는데, 너는 선을 행치 않는구나’ 하고 판단한 적은 없습니까? 여전히 내가 드러나기를 바라고, 타자는 가리워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까?
10. 평범한 사람들은 타자들이 사는 동일한 공간의 소리를 애써 ‘특별한 곳’이라 말하며, 스스로가 있는 평범성의 돌이키지 못함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스바냐 1장에서 하나님은 4대 믿음의 가문에서 자라난 스바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멸망과 재앙을 선포합니다.
10절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답니다. 이 구역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린답니다. 그 당시 ‘어문’은 느헤미야 시대에 지어진 화려한 문이었습니다. 어업의 중심 지역이면서, 이방인들이 공격할 때 만나게 되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늘 시끄럽고 소란스러웠습니다.
그곳과 막데스는 가장 먼 거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문은 화려하나, 막데스는 그에 비해 작은 마을입니다.
제2지역은 사람들이 팽창해서 만들어진 제2의 상업지구입니다. 그곳은 상업지구니까 시끄러웠습니다. 어느날 어문에 심판이 임했습니다. 제2지역에도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막데스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남쪽에서 평범하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어문의 울부짖음도, 제2지역의 아비규환도 남의 일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산이 무너져도 ‘저건 작은 산이니까’라며 특별함을 규정하고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11.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다가오셨나 봅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름으로 말이지요.
특별해야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철수 영수 영희처럼 흔하디 흔한 이름 예수. 당시 기록을 보면 숱하게 많은 예수가 등장합니다. 스쳐 지나가면 만나는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예수님 대신 죄의 멍에를 벗은 바라바의 이름이 ‘바라바 예수’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 예수를 살린 겁니다. 평범함을 죽이고, 평범함이 살아났습니다.
신은 자기 아들을 특별대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이니 더 평범하게, 그리고 사람들의 종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습에 예수는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천 년 전 예수는 평범한 마굿간으로 들어가,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 평범한 목수로 살다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특별한 죄인들과 같이, 손가락질 받으며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들, 평범한 사람들 곁에 물든 죄를 특별한 네가 평범한 이름으로 가서 덮어주렴. 그곳에 특별한 나의 사랑이 역사할거야.”
11. 코로나가 우리에게 닥치며 벌어졌던 일상의 흔적.
특별한 줄 알았던 코로나는 어느덧 일상이 되어, 평범한 삶을 덮은듯 합니다. 그런 와중에 그 누가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모두를 위하여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분의 주장과, 아이들을 위해 불안정한 백신을 맞출 수 없다는 주장, 그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있을까요?
모두를 위해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료계와, 당장 코로나가 아니라 굶어 죽겠다는 자영업자, 그 누가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 정말 무서운 것은 이 평범한 코로나로 인해 뒤틀려진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우리가 가진 악함이 스멀스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넌 틀렸어.”
“난 평범한데?”
“왜 너만 특혜를 받아?”
“왜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이런 이야기로 편이 나뉘고, 다투는 이 땅은, ‘나는 평범하다’는 합리화와 ‘너만 특별하다’는 판단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13.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가 발표되면서 그로 인해 방역패스를 적용당한 곳마다 정부에 대한 원성도 많지만, 교회에 대해서도 원성이 많습니다.
왜 교회만 적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선거를 의식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원론적인 이야기만 따지면 교회가 피해를 안 봤던 것은 아닙니다. 마스크를 쓰고 드리는 예배에서도 통성기도도, 찬양도 못했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밥먹는 건 되지만, 마스크 쓰고 아무것도 못 먹는데도 못 모이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시간 제한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는 분들이, 교회는 공예배를 제외하고 다른 예배나 모임이 금지되는 건 당연하다 합니다.
좁은 식당에서, 술집에서,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데, 거리를 두고 모이는 교회는 10명만 허용될 때도 있었습니다. 시간의 제약, 영업금지 등의 피해를 본 업종들에 주는 피해보상을, 교회는 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만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를 생각하면, 내가 살아갈 방향이 보입니다.
14. 저희 교회는 코로나가 생기기 시작한 2020 2월 말, 전격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습니다.
작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시스템과 모든 것들을 재정비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작은 웹캠 하나와 옛 캠코더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발표된 위드 코로나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오래된 낡은 의자를 다 바꾸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청년들이 언젠가는 모이겠지’ 하며 기쁜 마음으로 페인팅한 벽도 보여드릴 수 있겠지, 이제 우리도 모일 수 있겠지, 싶었습니다.
이제는 법적으로 허용하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백신도 거의 모두가 다 맞았습니다.
15. 그러나 다시 폭증하는 코로나를 봅니다.
방역패스로 인해 서로 갈라지는 모습과, 그 안에 “왜 교회는?”이라고 하는 부르짖음 가운데, 지난 주 다시 우리 교회는 예배팀만 모이는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상의 목소리가 우리를 힐난하기 위함이 아닌, ‘왜 평범한 우리와 함께 있어주지 않느냐’는 부르짖음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함께 하는 고통과 아픔 속에 그저 함께하고 싶습니다. 평범한 곳에 평범한 교회가 되어, 살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평범한 예수를 물들이고 싶습니다.
16. 다른 이야기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온라인 예배로 예배 자세가 다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압니다. 마음이 찢어집니다. 아이들이 대충 예배드리고는 코로나 핑계 대고 교회 안 나가는 대신, 나가서 놀고 먹고 다 한다는 이야기도 압니다. 마음이 무너집니다.
모이는 인원이 반타작 되었고, 이제 더 놔두면 1/3도 안 모일 거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슬프고 슬픕니다. 코로나 핑계대면서 오히려 사람 안 만나 행복하다는 사람들 모습도 알고 있습니다. 참 슬픕니다.
그러면서도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하고 힐난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집니다.
달꿈의 아이들이 세상으로 휩쓸려가는 모습을 볼 때는 마음이 아립니다. 만나는 사람들끼리도 작은 이해관계가 얽히면 이제는 쉽게 찢어져버리는 작금의 현실에 무너집니다.
17. 그러나 믿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어주다 보면, 믿음의 관계가 쌓입니다.
사랑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다 보면 사랑스러워집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우리를 믿어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보며 인내하십니다. 그분은 한번도 우리를 버린 일이 없이 임마누엘로 함께하십니다.
저는 언젠가 이 날들이 멈추고 다시 모임을 선언하는 날, 흩어진 모든 이들이 용기내 함께 모일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들의 상황과 모습이 제 기대와 달라도, 하나님의 소망을 믿습니다.
교회에 대한 제재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성탄을 앞두고, 연말을 앞두고, 송구영신예배를 앞두고,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받는 자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뼈를 깎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결정이 ‘모이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욕망의 소식이 아니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결정이 고통당하며 너를 미워하고 나의 특별함을 잊어간 채 평범함으로 물들어가는 대다수의 일상에,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성탄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1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생긴 끔찍한 전염병을 조심하십시다.
나와 너를 가르고, 거리두기를 하다 영원히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 악함 말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우리의 미움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속도로 우리의 이기심, 나를 알리고 너를 지우고 싶은 욕망이 번져갑니다. 너무나 평범하게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와버린 악함이 팽배합니다.
타자는 특별하고 나는 평범하다는 생각. 아니 모두가 특별한데, 평범 속에 자신을 뭍어버린 서글픔이 공존하는 시대에, 2천 년 전 가장 특별한 분이 가장 평범하게 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평범하셨던 분이 가장 특별하셨음을 깨닫는 순간, 나 역시 너 역시 존귀함을 회복할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삶을 사신 예수가 다시 가장 특별한 모습으로 오실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사랑으로 이겨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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